日帝强占期 經濟의 變化
◁ 日帝의 植民 統治 政策 | 日帝强占期 民族 運動 ▷
■ 10韓史2-01-02: 日帝의 植民 統治가 招來한 經濟 構造의 變化와 그것이 經濟생활에 미친 影響을 分析한다.
植民地 經濟의 變化는 生産의 增加와 生活의 惡化가 함께 나타났다는 點에서 出發해야 理解할 수 있습니다. 쌀 生産은 늘었는데 朝鮮人이 먹는 쌀은 줄었고, 工場은 늘었는데 工場의 主人과 技術者는 大部分 日本人이었습니다. 이 隔差는 土地, 市場, 資本이 日本 經濟의 必要에 맞추어 再編된 結果입니다.
土地 所有 構造
排他的 所有權
土地 調査 事業(1910~1918)이 바꾼 核心은 土地에 對한 權利의 構造입니다. 朝鮮 後期의 土地에는 地主의 所有權과 農民의 耕作權이 겹쳐 있었습니다. 小作農도 小作料를 제대로 내는 한 慣行으로 耕作을 이어 가는 境遇가 많았고, 一部 地域에서는 賭地權이라 하여 耕作할 權利 自體를 사고팔거나 물려주기도 했습니다.
土地 調査 事業은 申告하여 査定받은 所有權 하나만을 法的 權利로 認定했습니다. 한 筆地에 한 名의 所有者만 登記되는 排他的 所有權이 確立된 것입니다. 耕作權과 賭地權은 法이 保護하는 權利가 아니게 되었고, 小作은 地主와 小作人 사이의 期限附 契約으로 바뀌었습니다.
| 區分 | 土地 調査 事業 以前 | 土地 調査 事業 以後 |
|---|---|---|
| 權利의 構造 | 所有權과 耕作權이 重層的으로 共存 | 所有權만 法的 權利로 認定 |
| 小作의 性格 | 慣行에 따라 長期 耕作 可能 | 1秊 內外의 期限附 契約. 地主가 隨時로 小作人 交替 |
| 土地의 性格 | 賣買는 있었으나 權利 關係가 複雜 | 登記로 所有者가 確定되어 自由롭게 去來되는 商品 |
小作 條件의 惡化
小作權을 언제든 빼앗을 수 있게 되자 地主의 交涉力이 壓倒的으로 커졌습니다. 小作人들은 小作地를 얻기 爲해 서로 競爭해야 했고, 그 結果 小作 條件은 地主에게 有利한 方向으로 기울었습니다.
| 項目 | 內容 |
|---|---|
| 小作料 | 收穫의 절반을 내는 竝作半收가 一般的이었고, 5~7할까지 오르기도 함 |
| 公課 轉嫁 | 本來 所有者가 내야 할 地稅와 水利 組合費를 小作人에게 떠넘김 |
| 各種 負擔 | 種子·肥料 代金, 小作料 運搬 勞動, 地主·舍音에 對한 禮物 |
| 小作權 移動 | 小作料를 더 내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小作人을 바꿈 |
地主와 小作人 사이에는 地主를 代身해 小作地를 管理하는 舍音이 있었는데, 小作人의 選定과 交替가 舍音의 判斷에 달려 있어 舍音의 橫暴도 深刻했습니다. 1920秊代에 頻發한 小作爭議의 主要 要求가 小作料 引下, 公課 地主 負擔, 小作權 移動 反對였던 것은 이러한 條件을 反映합니다. 代表的인 事例인 岩泰島 小作爭議(1923~1924)에서 小作人들은 7~8할에 이르던 小作料를 4할로 낮추는 데 成功했습니다.
地主制의 擴大
土地가 登記된 商品이 되자 日本人의 土地 買入이 本格化되었습니다. 總督府가 國有地로 編入한 土地는 東洋拓殖株式會社와 日本人 移住民에게 싼값에 넘어갔고, 東洋拓殖株式會社는 朝鮮 最大의 地主가 되었습니다. 朝鮮人 地主도 所有權을 保障받고 쌀을 日本에 팔아 利益을 얻으며 土地를 늘렸습니다. 植民 權力과 地主는 利害를 같이했고, 總督府는 地主制를 農村 支配의 基盤으로 삼았습니다.
그 結果 自作農은 줄고 小作農은 늘었습니다.
| 秊度 | 自作農 | 自作 겸 小作農 | 小作農 |
|---|---|---|---|
| 1914 | 約 22% | 約 41% | 約 35% |
| 1932 | 約 16% | 約 25% | 約 53% |
玄鎭健의 短篇 「故鄕」(1926)은 이 過程을 한 人物의 生涯로 보여 줍니다. 作中 인물은 代代로 耕作하던 땅이 東洋拓殖株式會社로 넘어가 小作料를 견디지 못하게 되자 家族과 함께 西間島로 떠나고, 流浪 끝에 故鄕에 돌아와 보니 마을은 廢墟가 되어 있습니다. 小說이지만 當時 農村이 겪은 變化를 壓縮한 記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米穀 單作 構造
移出을 爲한 增産
産米 增殖 計劃(1920~1934)은 朝鮮 農業을 쌀 하나에 集中시키는 方向으로 再編했습니다. 日本人의 口味에 맞는 日本 品種을 普及하고, 水利 組合을 세워 水利 施設을 논농사에 맞추었으며, 밭을 논으로 바꾸는 畓 轉換을 奬勵했습니다.
當時 朝鮮에서 日本으로 쌀을 보내는 것은 法的으로 外國에 파는 輸出이 아니라 같은 帝國 內의 移動인 移出로 分類되었습니다. 關稅도 없고 代金도 같은 通貨로 決濟되었기 때문에, 쌀값이 日本보다 싼 朝鮮의 쌀은 日本 市場으로 쉽게 빠져나갔습니다.
| 期間(5秊 平均) | 朝鮮의 1人當 쌀 消費量 |
|---|---|
| 1912~1916 | 約 0.72石 |
| 1922~1926 | 約 0.59石 |
| 1932~1936 | 約 0.40石 |
生産量이 늘어도 移出量이 더 빠르게 늘었기 때문에 朝鮮人의 쌀 消費量은 오히려 줄었고, 不足한 食糧은 滿洲에서 들여온 조·수수·콩 같은 雜穀으로 메웠습니다. 朝鮮 農民은 쌀을 生産해 팔고 값싼 雜穀을 사 먹는 位置에 놓였습니다. 쌀은 食糧이 아니라 現金을 얻기 爲한 商品이 된 것입니다.
增産의 費用
增産에 드는 費用은 主로 農民이 負擔했습니다. 水利 組合은 區域 內 土地 所有者에게 組合費를 賦課했는데, 大地主가 主導해 設立한 境遇가 많았고 組合費는 小作人에게 轉嫁되거나 中小 自作農에게 過重한 負擔이 되었습니다. 組合費를 내지 못한 自作農이 土地를 팔고 小作農이 되는 事例가 잇따르면서 水利 組合 反對 運動도 일어났습니다. 日本 品種은 化學 肥料를 많이 써야 收穫이 늘었기 때문에 肥料 代金도 農家의 現金 支出을 늘렸습니다.
價格 變動에 對한 脆弱性
農家 所得이 쌀값 하나에 매이면 쌀값의 變動이 곧바로 生計를 흔듭니다. 1930秊 前後 大恐慌과 豐作이 겹쳐 쌀값이 暴落하자, 쌀을 팔아 現金을 마련해야 했던 農家는 負債를 갚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쌀값이 오를 때의 利益은 小作料로 쌀을 大量 거두어들이는 地主에게 돌아갔고, 쌀값이 내릴 때의 損失은 自作農과 小作農에게 集中되었습니다.
農民의 沒落
春窮과 赤字
土地를 잃은 農民은 小作農이 되었고, 小作農은 高率의 小作料와 高利貸를 견디지 못해 農村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 調査 | 內容 |
|---|---|
| 「朝鮮의 小作 慣行」(1930 調査) | 봄에 食糧이 떨어지는 春窮 狀態의 農家 比率이 自作農 約 18%, 自作 겸 小作農 約 38%, 小作農 約 68% |
| 朝鮮 農會 農家 經濟 調査(1930~1932) | 調査 對象 農家가 自作農·自小作農·小作農을 가리지 않고 年間 收支에서 赤字 |
小作農의 三分의 二가 春窮을 겪었다는 數値는, 小作料를 내고 나면 다음 收穫까지 먹을 食糧이 남지 않는 構造였음을 보여 줍니다. 自作農에서도 春窮 農家가 나왔다는 點에서, 沒落이 小作農만의 問題가 아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負債의 惡循環
春窮期의 農家는 빚을 내어 食糧을 마련했습니다. 農村의 私債는 봄에 꾸고 가을에 5할의 利子를 붙여 갚는 長利가 一般的이었고, 地主가 債權者를 겸하는 境遇도 많았습니다. 秋收 뒤 小作料와 元利金을 갚고 나면 다시 봄에 빚을 지는 循環이 되풀이되었습니다.
土地가 登記된 商品이 된 狀況에서 土地는 擔保가 되었고, 빚을 갚지 못한 自作農의 土地는 債權者에게 넘어갔습니다. 近代的 所有權은 農民의 土地를 지켜 주는 裝置이기보다, 土地가 負債를 媒介로 地主에게 集中되는 通路로 作用했습니다.
農村 離脫
沒落한 農民의 進路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 進路 | 內容 |
|---|---|
| 火田民 | 山으로 들어가 숲을 태우고 火田을 일굼. 總督府는 山林 保護를 名分으로 火田을 團束하여 生計는 더욱 不安定 |
| 都市 貧民 | 都市로 나가 日傭 勞動者가 되거나, 都市 周邊에 움집을 짓고 사는 土幕民이 됨 |
| 國外 移住 | 滿洲로 건너가 開墾과 小作에 從事하거나, 日本으로 건너가 土木·炭鑛·工場의 下層 勞動者가 됨 |
1920秊代부터 日本의 朝鮮人 人口가 크게 늘고, 滿洲의 朝鮮人 移住民도 急增했습니다. 植民地 農村에서 밀려난 人口가 帝國의 下層 勞動力으로 編入된 것입니다.
商品 貨幣 經濟
對日 從屬 貿易 構造
開港 以後 朝鮮은 이미 日本과 淸에 穀物을 팔고 綿製品을 사들이는 貿易 構造를 갖고 있었습니다. 植民 統治는 이 構造를 日本 한 나라로 集中시키고 固定했습니다. 植民地 時期 朝鮮의 對外 交易에서 日本이 차지하는 比重은 대체로 8~9할에 이르렀습니다.
| 方向 | 主要 品目 |
|---|---|
| 朝鮮 → 日本(移出) | 쌀, 大豆, 綿花, 生絲, 鑛産物 等 食糧과 原料 |
| 日本 → 朝鮮(移入) | 綿織物, 機械, 金屬 製品, 雜貨 等 工業 製品 |
原料를 싸게 팔고 加工된 製品을 비싸게 사는 構造에서는 加工 過程의 附加價値와 雇傭이 日本에 남습니다. 1923秊 日本 商品에 對한 關稅가 大部分 撤廢되면서 이 構造는 더 굳어졌습니다.
在來 手工業의 解體
값싼 工場 製品이 밀려들어 오자 在來 手工業은 競爭力을 잃었습니다. 집에서 짜던 무명은 工場제 廣木에, 짚신은 고무신에, 鍮器는 工場제 食器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農家의 副業이던 家內 手工業이 사라지면서 農家는 生活에 必要한 物件을 現金으로 사야 했고, 그 現金을 마련하기 爲해 다시 쌀을 팔아야 했습니다. 消費 生活은 便利해졌지만, 農家 經濟는 市場과 日本 工業에 더 깊이 依存하게 되었습니다.
金融 體系
植民地 金融은 日本 經濟와의 連結과 統治의 便宜를 中心으로 構成되었습니다.
| 機關 | 役割 |
|---|---|
| 朝鮮銀行(1911) | 發券을 맡은 中央 銀行. 日本銀行권과 等價로 連動된 朝鮮銀行권을 發行하고, 滿洲 進出 資金도 供給 |
| 朝鮮殖産銀行(1918) | 農業·産業에 長期 資金 供給. 水利 組合과 大地主, 日本人 企業에 主로 融資 |
| 金融 組合 | 地方과 農村의 小額 金融. 總督府의 監督을 받으며 貯蓄 奬勵와 戰時 國債 消化에도 動員 |
形式은 近代的 金融 制度였지만, 擔保와 信用을 갖춘 日本人 企業과 大地主가 資金을 優先 利用했습니다. 擔保가 없는 小作農은 制度 金融에 거의 다가갈 수 없었고, 農村의 高利貸는 植民地 時期 내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工業 構造
民族 資本의 位置
1910秊代의 會社令은 會社 設立 自體를 許可로 묶어 民族 資本의 成長을 막았습니다. 1920秊 會社令이 廢止되어 申告制로 바뀌자 韓國人의 會社 設立도 늘었지만, 資本과 技術을 갖춘 日本 企業이 主要 業種을 차지했습니다.
韓國人 企業은 京城紡織(1919), 平壤의 메리야스·고무 工業 等 一部를 除外하면 精米·釀造·皮革 같은 小規模 業種에 머물렀습니다. 規模가 큰 韓國人 企業도 總督府의 補助金과 殖産銀行의 融資, 日本 企業과의 去來에 依存해야 했기 때문에 植民 權力과 完全히 分離될 수 없었습니다. 1930秊代 말 朝鮮 工業에 投下된 資本의 大部分은 日本人 所有였습니다. 工場은 늘었지만 그 工場의 主人이 누구인가는 다른 問題였습니다.
兵站基地化와 地域 不均衡
1930秊代에 들어 日本의 財閥이 朝鮮에 本格的으로 進出했습니다. 日本 本土에서는 重要 産業 統制法(1931)으로 企業 活動이 規制되었지만 朝鮮에는 이 法이 適用되지 않았고, 工場法도 施行되지 않아 勞動 時間과 賃金에 對한 規制가 없었습니다. 低賃金 勞動力과 豐富한 電力, 느슨한 規制가 日本 資本을 끌어들인 條件이었습니다.
電力과 地下 資源이 豐富한 北部에는 興南의 窒素 肥料 工場을 中心으로 한 化學 工業과 製鐵·金屬 工業이, 南部에는 紡織·食品 같은 輕工業이 配置되었습니다. 1930秊代 후반에는 工業 生産額이 農業 生産額에 肉薄할 만큼 工業의 比重이 커졌습니다.
이 工業化에는 세 가지 特徵이 있습니다.
| 特徵 | 內容 |
|---|---|
| 目的 | 朝鮮 內部의 需要가 아니라 日本의 軍需와 大陸 侵略에 맞추어 業種과 立地가 정해짐. 生産物도 大部分 日本과 滿洲로 나감 |
| 所有와 技術 | 資本은 日本 財閥, 經營과 技術職은 日本人, 未熟鍊 單純 勞動은 朝鮮人. 朝鮮人에게 技術과 經營 經驗이 蓄積되기 어려웠음 |
| 産業 聯關 | 北部의 重化學 工業과 南部의 輕工業·農業이 서로 原料와 製品을 주고받기보다 각각 日本 經濟에 直接 連結됨 |
産業이 朝鮮 內部에서 서로 이어지지 않고 日本을 中心으로 配置되었기 때문에, 光復과 分斷으로 日本과의 連結이 끊기고 南北이 나뉘자 南은 電力과 重工業이, 北은 食糧과 輕工業이 不足한 歪曲된 經濟가 남았습니다. 日本人 技術者가 떠난 工場은 稼動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經濟생활
勞動者의 形成과 差別
沒落한 農民이 都市와 工場으로 흘러들면서 賃金 勞動者 階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大部分은 工場에 安定的으로 就業한 勞動者가 아니라, 그날그날 일감을 찾는 土木·建築·運搬 日傭 勞動者였습니다. 農村에서 밀려나는 人口가 工場의 雇傭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勞動 市場에는 늘 過剩 人口가 있었고, 이것이 低賃金을 維持하는 條件이 되었습니다.
工場 勞動 條件도 劣惡했습니다. 日本에서는 1916秊부터 工場法이 施行되어 幼年 勞動과 女性의 夜間 勞動을 制限했지만, 朝鮮에는 植民地 時期 내내 工場法이 施行되지 않았습니다.
| 項目 | 實態 |
|---|---|
| 勞動 時間 | 하루 12時間 以上이 普通. 紡織 工場은 晝夜 2交代 |
| 民族 間 賃金 | 朝鮮人 勞動者의 賃金은 같은 職種 日本人 勞動者의 折半 前後 |
| 性別 賃金 | 朝鮮人 女性 勞動者의 賃金은 朝鮮人 男性 勞動者의 折半 前後. 民族과 性別의 差別이 겹침 |
| 幼年 勞動 | 紡織·製絲 工場 等에서 少年·少女 勞動者를 低賃金으로 雇傭 |
| 勞務 管理 | 寄宿舍 監禁, 罰金과 賃金 强制 貯蓄, 監督의 暴行 |
같은 工場에서 같은 일을 해도 民族에 따라 賃金과 待遇가 갈렸다는 點이 植民地 勞動의 特徵입니다. 이 때문에 勞動 爭議는 經濟的 要求와 民族的 抵抗의 性格을 함께 띠었습니다. 元山 總罷業(1929)은 日本人 監督이 朝鮮人 勞動者를 毆打한 事件에서 始作되어 元山 地域 勞動者 2천여 名이 넉 달 가까이 罷業을 이어 갔고, 國內外의 支援을 받았습니다.
都市와 消費 生活
鐵道가 놓이고 港灣이 開發되면서 京城·釜山·仁川·平壤·群山·木浦 같은 都市가 커졌습니다. 群山과 木浦는 湖南의 쌀을 日本으로 실어 내는 港口로 成長한 都市입니다. 百貨店과 電車, 카페와 映畵館이 들어서고 廣木·고무신·雪糖·調味料 같은 工場 製品이 日常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近代的 消費 生活을 누린 사람은 一部였습니다. 京城은 淸溪川을 境界로 日本人이 모여 사는 南村과 朝鮮人이 사는 北村으로 나뉘었는데, 道路·上下水道·電氣 같은 施設은 南村에 먼저 設置되었습니다. 都市 周邊에는 農村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河川가나 山기슭에 움집을 짓고 사는 土幕民의 集團 거주지가 생겼습니다. 土幕民은 都市 美觀과 衛生을 理由로 强制 撤去되어 都市 바깥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같은 都市 안에 百貨店과 土幕이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戰時 統制 經濟
中日 戰爭 以後, 特히 國家總動員法(1938)이 適用된 뒤로 經濟 生活은 市場이 아니라 命令으로 움직였습니다. 生産과 分配, 價格과 勞動이 모두 統制의 對象이 되었습니다.
| 領域 | 統制의 內容 |
|---|---|
| 食糧 | 米穀 供出制로 政府가 정한 價格에 割當量을 强制 買入. 마을 단위로 割當하고 連帶 責任을 지움. 都市에서는 食糧 配給制로 정해진 量만 配給 |
| 物資 | 金屬類 回收令(1941)으로 놋그릇·숟가락·祭器·敎會 鐘까지 軍需 物資로 거두어 감. 生活 必需品은 切符制(配給票)로 配給 |
| 價格 | 價格 等 統制令(1939)으로 物價와 賃金을 凍結 |
| 勞動力 | 勤勞 報國隊와 徵用으로 鑛山·工事場·軍需 工場에 動員 |
| 資金 | 貯蓄 奬勵와 國債 買入, 國防 獻金 强要로 民間의 資金을 戰費로 吸收 |
農民은 自家 消費할 食糧까지 供出로 빼앗기고 配給에 依存해야 하는 處地가 되었습니다. 公定 價格과 實際 價値의 差異가 커지자 物資는 暗市場으로 흘러갔고, 暗市場의 價格은 公定 價格의 몇 倍에 이르렀습니다. 價格은 統制되었지만 實際 生活은 더 窮乏해졌습니다.
整理
| 領域 | 植民 統治 以前 | 植民 統治 以後 | 經濟생활에 미친 影響 |
|---|---|---|---|
| 土地 | 地主의 所有權과 農民의 耕作權이 共存 | 地主의 排他的 所有權만 認定, 小作은 期限附 契約 | 小作料 上昇과 公課 轉嫁, 小作農 增加 |
| 農業 | 自給用 作物과 商品 作物이 섞인 農業 | 쌀 單作·移出 中心 | 쌀 消費 減少, 쌀값 變動에 脆弱 |
| 貿易 | 開港 以後 日本·淸과 交易 | 日本에 集中. 原料 移出·工業 製品 移入 | 在來 手工業 解體, 現金 支出 增加 |
| 金融 | 私債와 契 中心 | 朝鮮銀行·殖産銀行·金融 組合 體系 | 制度 金融은 日本人과 大地主에게, 農民에게는 高利貸와 負債 |
| 工業 | 在來 手工業 | 日本 資本 中心, 兵站基地化와 南北 不均衡 | 民族·性別 賃金 差別, 技術 蓄積의 制約 |
| 階層 | 農民 中心 | 小作農·火田民·土幕民·日傭 勞動者·國外 移住民으로 分化 | 農村 離脫과 都市 貧民 形成 |
日帝 强占期에 鐵道가 놓이고 工場이 세워졌으며 生産 指標가 成長한 것은 事實입니다. 그러나 經濟 構造를 分析할 때에는 施設과 生産量의 增加만이 아니라, 그 施設이 누구의 必要에 따라 配置되었고 增加한 生産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鐵道는 쌀과 原料를 港口로 실어 내는 方向으로 놓였고, 工場은 日本의 軍需를 爲해 配置되었으며, 增産된 쌀은 日本으로 移出되었습니다. 그 過程에서 多數의 韓國人은 土地를 잃고 負債와 低賃金 勞動에 묶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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