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의 植民 統治 政策
◁ 10hansa1-0303 | 日帝强占期 經濟의 變化 ▷
※ 開港 以後의 社會·經濟 變化(1-03-03)는 1910秊까지의 國權 侵奪(1-03-04)을 背景으로 하므로, 國權 侵奪을 먼저 읽는 順序로 이었습니다.
■ 10韓史2-01-01: 日帝의 植民 統治 政策을 帝國主義 秩序의 變動과 聯關하여 理解한다.
帝國主義 秩序의 變動
列强의 植民地 分割
19世紀 後半, 産業革命을 마친 歐美 列强은 原料 供給地와 商品 市場, 資本 投資處를 얻기 爲해 亞細亞와 阿弗利加를 分割해 나갔습니다. 强大國이 軍事力과 資本을 앞세워 다른 地域을 支配하려는 이러한 傾向을 帝國主義라고 합니다.
植民地를 다스리는 方式은 列强마다 달랐습니다. 英國은 現地 支配層을 活用하는 間接 統治를 擴大하고 一部 植民地에 自治를 許容했으며, 佛蘭西는 本國의 言語와 文化를 植民地에 移植하는 同化主義를 標榜했습니다.
같은 植民 統治라도 實際 運營은 이 原則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英國은 인도의 藩王國이나 나이지리아 北部처럼 現地 君主와 族長을 앞세워 다스리면서 그들을 植民 支配의 末端으로 삼았고, 佛蘭西는 알제리를 本國의 道로 編入할 만큼 同化를 내세웠지만 무슬림 住民 大多數에게는 오랫동안 本國人과 같은 市民權을 주지 않았습니다. 同化를 標榜하면서 權利의 平等은 拒否하는 矛盾은 뒤에 보듯 日本의 朝鮮 統治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明治維新 以後 近代化를 推進한 日本도 이 隊列에 合流했습니다. 淸日 戰爭(1894–1895)으로 臺灣을 얻었고, 露日 戰爭(1904–1905) 前後로 美國과의 가쓰라·태프트 密約, 第2次 英日 同盟, 포츠머스 條約(이상 1905)을 통해 韓半島에 對한 獨占的 支配權을 列强에게서 承認받았습니다. 이어 乙巳勒約(1905)으로 外交權을 빼앗고, 1910秊 大韓帝國의 國權을 强制로 强奪했습니다.
朝鮮 統治의 原型은 臺灣에서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日本은 1895秊 臺灣總督府를 設置해 軍人 出身 總督에게 行政과 軍事權을 한데 쥐여 주었고, 1896秊에는 總督이 法律과 같은 效力을 지닌 命令을 내릴 수 있게 했습니다. 1898秊부터 民政長官을 맡은 後藤新平은 臨時 土地 調査局을 두어 土地를 測量하고 所有權을 整理해 地稅 收入을 늘리는 한便, 舊慣 調査를 벌여 現地의 慣習과 社會 組織을 統治에 活用할 資料로 삼았습니다. 그는 넙치의 눈을 도미의 눈으로 바꿀 수 없듯 現地 事情을 먼저 알고 다스려야 한다며 이를 '生物學의 原則'이라 불렀습니다. 武官 總督의 强力한 權限, 土地 調査를 통한 財政 基盤 確保, 警察을 앞세운 末端 支配는 15秊 뒤 朝鮮總督府에서 거의 그대로 되풀이됩니다. 朝鮮 總督 역시 陸海軍 大將 가운데서 任命되었고, 法律을 대신하는 制令을 發布할 수 있었습니다.
日本은 言語·文化·地理的으로 가까운 隣國을 支配하게 되자 同化主義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法的으로는 朝鮮을 日本 本土인 '內地'와 區別되는 '外地'로 두어 日本 憲法과 法律을 그대로 適用하지 않았습니다. 同化는 要求하되 同等한 權利는 주지 않는 이 構造가 植民 統治 35秊을 꿰뚫는 基本 矛盾입니다.
統治의 外形은 國際 情勢의 變化와 韓國人의 抵抗에 따라 크게 세 時期로 나뉩니다.
第1次 世界 大戰과 國際 協調
美國 大統領 T. W. 윌슨은 1918秊 14個條 平和 原則을 發表했고, 이 가운데 各 民族이 自身의 運命을 스스로 決定해야 한다는 民族自決主義가 植民地 民族의 注目을 받았습니다. 파리 講和 會議(1919)에서 이 原則은 敗戰國의 舊領土에만 適用되었고, 戰勝國 日本의 植民地인 朝鮮은 議題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原則은 植民地 民族의 獨立 運動을 鼓舞하여 3·1 運動(1919)과 中國의 5·4 運動(1919)으로 이어졌습니다.
戰後 秩序를 調整하기 爲해 열린 워싱턴 會議(1921–1922)의 結果는 다음과 같습니다.
| 條約 | 內容 | 日本에 對한 意味 |
|---|---|---|
| 4個國 條約 | 太平洋 地域의 現狀 維持 | 英日 同盟 廢棄 |
| 5個國 海軍 軍縮 條約 | 主力艦 保有 比率을 美·英·日 5:5:3으로 制限 | 海軍力 膨脹 抑制 |
| 9個國 條約 | 中國의 主權 尊重과 門戶 開放 | 中國 進出 制約. 같은 會議에서 山東 利權 返還에도 合意 |
日本 國內에서도 1918秊 쌀 騷動을 契機로 原敬의 政黨 內閣이 들어섰고, 1925秊에는 男子 普通 選擧法이 制定되는 等 大正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自由主義 風潮가 나타났습니다. 原敬 內閣은 植民地에도 本國의 制度를 段階的으로 擴大한다는 內地延長主義를 내걸었습니다.
1920秊代의 이른바 '文化 統治'는 3·1 運動이라는 內部 要因과, 國際 協調 및 日本 國內 政治의 變化라는 外部 要因이 겹친 結果였습니다.
大恐慌과 侵略 戰爭
1929秊 美國에서 始作된 大恐慌으로 世界 經濟가 痲痹되자, 植民地가 많은 英國과 佛蘭西 等은 本國과 植民地를 하나로 묶고 關稅 障壁을 높이는 블록 經濟로 對應했습니다. 植民地가 적었던 日本, 獨逸, 伊太利는 對外 侵略에서 活路를 찾았고, 세 나라 모두에서 全體主義 勢力이 權力을 잡았습니다.
日本에서는 軍部가 政治의 前面에 나섰습니다. 5·15 事件(1932)으로 政黨 內閣 時代가 끝났고, 2·26 事件(1936) 以後 軍部의 影響力은 決定的이 되었습니다.
| 秊度 | 日本의 侵略과 對外 政策 |
|---|---|
| 1931 | 滿洲 事變 → 이듬해 滿洲國 樹立 |
| 1933 | 國際聯盟 脫退 |
| 1937 | 中日 戰爭 勃發 |
| 1938 | '東亞 新秩序' 聲明 |
| 1940 | 佛蘭西領 印度支那 北部 進駐, '大東亞 共榮圈' 標榜, 獨逸·伊太利와 3國 同盟 |
| 1941 | 太平洋 戰爭 勃發 |
戰爭이 長期化될수록 日帝는 朝鮮을 收奪의 對象에 그치지 않고 戰爭 遂行을 爲한 兵站基地이자 人力 供給源으로 삼았습니다. 이를 爲해 韓國人의 民族 正體性 自體를 지우려 한 것이 民族 抹殺 統治입니다.
1910秊代 武斷 統治
朝鮮總督府
國權 被奪 以後 日帝는 統治 機構로 朝鮮總督府를 두었습니다. 總督은 天皇에게 直屬되어 日本 內閣의 統制도 거의 받지 않았고, 任用 資格은 現役 陸海軍 大將으로 限定되었습니다.
第2條 總督은 親任으로 하며, 陸海軍 大將으로 이에 充當한다.
第3條 總督은 天皇에 直隷하고, 委任의 範圍 內에서 陸海軍을 統率하며 朝鮮 防備의 일을 管掌한다.
— 「朝鮮總督府 官制」(1910)
總督의 權限에서 核心은 制令權입니다. 1911秊 日本 議會가 制定한 法律에 따라 總督은 本來 法律로 정해야 할 事項을 自身의 命令인 制令으로 정할 수 있었습니다. 行政의 首長이 立法權까지 쥐었고, 裁判所도 總督府에 所屬되어 司法도 獨立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軍隊 統率權이 더해져 總督은 立法·行政·司法·軍事를 한 손에 쥔 存在가 되었습니다.
總督의 諮問 機關으로 中樞院을 두어 韓國人도 統治에 參與하는 模樣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議長은 日本人 政務總監이 맡았고, 議員은 主로 合倂에 功을 세운 親日 人士로 채워졌으며, 議決權이 없어 實質的 權限은 없었습니다.
憲兵 警察 制度
軍事 警察인 憲兵이 一般 警察 業務를 함께 맡는 憲兵 警察 制度가 施行되었습니다. 憲兵 警察은 治安만이 아니라 義兵 討伐, 諜報 收集, 徵稅 補助, 衛生 團束, 日本語 普及까지 日常 全般에 介入했습니다.
憲兵 警察의 權力을 法的으로 뒷받침한 것은 犯罪 卽決例(1910)입니다. 이에 따라 警察署長이나 憲兵隊長은 輕犯罪에 對해 正式 裁判 없이 卽決로 處罰할 수 있었습니다. 그 處罰 對象을 정한 警察犯 處罰 規則은 87個 項目에 이를 만큼 範圍가 넓었습니다.
다음 各 號의 하나에 該當하는 者는 拘留 또는 科料에 處한다.
· 一定한 住居나 生業 없이 여러 곳을 徘徊하는 者
· 不穩한 演說을 하거나 不穩한 文書·圖畵·詩歌를 揭示·頒布·朗讀하는 者
· 함부로 여러 사람을 모아 官公署에 請願이나 陳情을 하는 者
— 「警察犯 處罰 規則」(1912) 中 一部
'不穩'의 基準은 條文에 없습니다. 判斷은 現場의 憲兵과 警察에게 맡겨졌고, 處罰도 그들이 直接 내렸습니다.
日帝는 甲午改革 때 廢止되었던 笞刑을 事實上 되살리면서 그 對象을 韓國人으로 限定했습니다.
第1條 3個月 以下의 懲役 또는 拘留에 處할 者는 그 情狀에 따라 笞刑에 處할 수 있다.
第13條 本令은 朝鮮人에 限하여 適用한다.
— 「朝鮮 笞刑令」(1912)
近代 法治와 文明化를 支配의 名分으로 내세운 日帝가 身體刑을 民族에 따라 差別的으로 適用했다는 點에서, 第13條는 同化와 差別이 共存한 植民 統治의 性格을 한 條文으로 보여 줍니다. 笞刑令은 3·1 運動 以後인 1920秊에 廢止되었습니다.
言論·出版·集會·結社의 自由도 事實上 사라졌습니다. 大韓帝國 時期의 民族 新聞은 廢刊되고 總督府 機關紙만 남았으며, 官吏와 敎員까지 制服을 입고 칼을 찼습니다. 新民會 會員을 大擧 檢擧한 105人 事件(1911)은 國內 民族 運動을 組織的으로 壞滅시키려 한 代表的 事例입니다.
第1次 朝鮮 敎育令(1911)
敎育의 目標는 植民 統治에 順應하는 下級 人力을 기르는 데 있었습니다. 普通 學校의 修業 秊限은 4秊으로 日本人 學校(6秊)보다 짧았고, 實業 敎育이 中心이었으며, 大學은 設立을 許容하지 않았습니다.
第2條 敎育은 敎育에 關한 勅語의 趣旨에 基하여 忠良한 國民을 育成함을 本義로 한다.
第5條 普通 敎育은 普通의 知識과 技能을 주고, 特히 國民된 性格을 涵養하며 國語를 普及함을 目的으로 한다.
— 「第1次 朝鮮 敎育令」(1911)
여기서 '國語'는 日本語를, '國民'은 日本 天皇의 臣民을 가리킵니다. 用語 自體에 同化 政策이 內在해 있습니다.
日帝는 民族 敎育의 據點도 統制했습니다. 私立 學校 規則(1911, 1915 改正)으로 私立 學校의 設立과 敎科를 嚴格히 規制했고, 書堂 規則(1918)으로 書堂도 許可制로 묶었습니다. 이 時期에 私立 學校 數는 크게 줄었습니다.
土地 調査 事業(1910–1918)
日帝는 近代的 土地 所有權의 確立을 名分으로 土地 調査 事業을 實施하고, 1912秊 土地 調査令을 公布했습니다. 實質的 目的은 安定的인 地稅 收入을 確保하고, 日本人이 韓國 土地를 安全하게 사고팔 수 있는 制度를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第4條 土地의 所有者는 朝鮮 總督이 정하는 期間 內에 그 住所·姓名 또는 名稱과 所有地의 所在·地目·字番號·四標·等級·地積·結數를 臨時 土地 調査局長에게 申告해야 한다.
— 「土地 調査令」(1912)
事業은 申告主義로 進行되었습니다. 所有者가 直接 申告하면 調査를 거쳐 所有權을 査定했고, 査定된 所有權은 以前의 어떤 權利보다 優先했습니다.
| 結果 | 內容 |
|---|---|
| 財政 | 隱結이 드러나고 課稅 對象 土地가 늘어 總督府의 地稅 收入이 크게 增加 |
| 國有地 創出 | 驛屯土·宮庄土 等 王室과 官廳의 土地, 所有者가 分明하지 않은 마을 共有地가 國有地로 編入. 總督府는 이를 東洋拓殖株式會社와 日本人에게 싼값에 拂下 |
| 地主 | 地主의 所有權만 排他的 權利로 確定되어 地主制가 强化 |
| 農民 | 慣行으로 認定되던 耕作權과 賭地權이 否定되어, 地主의 意思에 따라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期限附 小作農으로 轉落 |
硏究의 變化 以前에는 農民이 申告 節次를 몰라 土地를 대거 빼앗겼다는 說明이 많았습니다. 以後 土地 臺帳을 分析한 硏究들은 未申告로 國有地가 된 私有地의 比重은 크지 않았다고 봅니다. 農民이 입은 打擊의 核心은 申告 漏落보다, 王室·官廳·共有地의 國有化와 耕作權의 否定, 그리고 地主 中心의 所有權 確定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山林에 對해서도 林野 調査 事業(1917–1924)이 이어져, 所有 關係가 不分明한 林野 相當 部分이 國有林이 되었습니다.
産業에 對한 統制
會社令(1910)은 會社 設立을 許可制로 묶어 韓國人 資本의 成長을 抑制했습니다.
第1條 會社의 設立은 朝鮮 總督의 許可를 받아야 한다.
第5條 會社가 本令이나 本令에 依據하여 發하는 命令 또는 許可의 條件을 違反하거나, 公共의 秩序나 善良한 風俗에 反하는 行爲를 할 때에는, 朝鮮 總督은 事業의 停止·禁止, 支店의 閉鎖, 會社의 解散을 命할 수 있다.
— 「會社令」(1910)
第5條의 '公共의 秩序'와 '善良한 風俗'도 基準이 總督의 判斷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設立 段階의 許可와 事後의 解散 命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韓國人 企業은 生存 自體를 總督府에 依存해야 했습니다.
그 밖에 漁業令(1911), 森林令(1911), 朝鮮 鑛業令(1915) 等으로 資源을 掌握했고, 朝鮮殖産銀行(1918)을 세워 産業 金融을 統制했습니다. 煙草·人蔘·소금 等은 專賣制로 總督府 收入源이 되었습니다. 鐵道에서는 湖南線과 京元線(1914)이 開通되었는데, 湖南線은 穀倉 地帶의 쌀을 港口로, 京元線은 東海岸과 北部를 首都와 잇는 路線으로 物資 輸送과 軍事 目的을 함께 考慮했습니다.
1920秊代 文化 統治
統治 方式의 轉換
3·1 運動으로 武斷 統治의 限界가 드러나고 國際 輿論도 나빠지자, 日帝는 1919秊 8月 總督府 官制를 改正해 總督 任用 資格에서 武官 規定을 없애고 憲兵 警察 制度를 廢止했습니다. 새로 赴任한 齋藤實 總督은 '文化의 發達과 民力의 充實'을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標榜과 實際는 一致하지 않았습니다.
| 項目 | 標榜 | 實際 |
|---|---|---|
| 總督 任用 | 文官도 任用 可能 | 光復까지 文官 總督은 한 名도 任命되지 않음. 齋藤實 自身도 海軍 大將 |
| 警察 | 憲兵 警察 廢止, 普通 警察制 | 1920秊을 前後해 警察 官署는 約 4倍, 警察 人員은 約 3倍로 增加. 1面 1駐在所 體制 |
| 參政 | 道 評議會, 府·面 協議會 設置(1920) | 議決權 없는 諮問 機構. 選擧權은 一定 額 以上의 納稅者에게만 있어 日本人과 富裕層에게 有利. 1930秊 改正으로 一部가 議決 機關이 되었으나 議長은 官選이고 權限도 制限的 |
| 言論 | 朝鮮日報·東亞日報(1920) 創刊 許容 | 事前 檢閱, 記事 削除, 押收, 停刊으로 統制 |
| 敎育 | 第2次 朝鮮 敎育令(1922). 普通 學校 6秊, 朝鮮語 必修, 大學 設立 規定 新設 | 學校 數는 여전히 不足하여 就學率이 낮았음. 民立 大學 設立 運動은 挫折되고, 總督府가 京城帝國大學(1924 豫科, 1926 學部)을 세움 |
民族 分裂
文化 統治의 目標는 親日 勢力을 길러 民族 運動 陣營을 分裂시키는 데 있었다고 評價됩니다. 齋藤實가 남긴 文書에는 貴族·兩班·儒生·富豪·實業家·敎育家·宗敎家 等 各 階層에 親日 人物을 浸透시키고, 親日 團體를 組織하게 한다는 構想이 담겨 있습니다.
이 時期 民族 運動은 實際로 分化되었습니다. 李光洙의 「民族的 經綸」(1924)처럼 日帝의 支配를 前提로 自治를 追求하자는 自治論이 나타나자, 非妥協的 民族主義 勢力은 이를 批判하며 社會主義 勢力과 손잡고 新幹會(1927)를 結成했습니다. 文化 統治의 懷柔가 效果를 거둔 部分과, 이에 對抗하는 連帶가 함께 나타난 셈입니다.
懷柔와 함께 彈壓의 法的 裝置는 오히려 强化되었습니다.
第1條 國體를 變革하거나 私有 財産 制度를 否認할 것을 目的으로 結社를 組織하거나, 그 情을 알고 이에 加入한 者는 10秊 以下의 懲役 또는 禁錮에 處한다.
— 「治安維持法」(1925)
'國體 變革'은 天皇制의 否定을, '私有 財産 制度 否認'은 社會主義를 겨냥한 表現입니다. 朝鮮의 獨立을 追求하는 것은 天皇의 統治權이 미치는 領域을 줄이는 일로 解釋되어 '國體 變革'에 該當했고, 이 法은 民族主義와 社會主義 運動을 가리지 않고 適用되었습니다. 日本 本土에서 男子 普通 選擧法과 같은 해에 制定된 이 法은 1928秊 改正으로 最高刑이 死刑으로 높아졌습니다.
産米 增殖 計劃(1920–1934)
第1次 世界 大戰 前後 日本은 急激한 工業化와 都市化로 쌀 需要가 生産을 앞질렀고, 1918秊에는 쌀값 暴騰으로 全國的인 쌀 騷動을 겪었습니다. 日帝는 朝鮮을 日本의 食糧 供給地로 삼기로 하고, 1920秊부터 産米 增殖 計劃을 推進했습니다.
計劃은 土地 改良(水利 施設 擴充, 開墾, 干拓)과 農事 改良(日本 品種 普及, 金肥 使用 擴大)의 두 軸으로 構成되었습니다. 1926秊에는 計劃을 更新해 規模를 키웠습니다.
生産量은 늘었지만 目標에는 미치지 못했고, 日本으로의 搬出量은 增産量보다 훨씬 빠르게 늘었습니다. 그 結果 朝鮮人이 먹는 쌀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 期間(5秊 平均) | 朝鮮의 1人當 쌀 消費量 |
|---|---|
| 1912–1916 | 約 0.72石 |
| 1917–1921 | 約 0.69石 |
| 1922–1926 | 約 0.59石 |
| 1927–1931 | 約 0.50石 |
| 1932–1936 | 約 0.40石 |
같은 時期 日本의 1人當 소비량은 1石 남짓을 維持했습니다. 朝鮮에서 不足해진 食糧은 滿洲에서 들여온 조·수수 等 雜穀으로 메웠습니다. 쌀이 '商品'으로 日本에 팔려 나가고, 朝鮮 農民은 그 쌀을 生産하면서도 雜穀을 먹는 構造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增産의 利益과 費用은 階層에 따라 不平等하게 나뉘었습니다.
| 階層 | 影響 |
|---|---|
| 地主 | 收穫의 절반 以上을 小作料로 거두어 日本에 販賣하며 利益을 얻음. 地主制가 더욱 擴大 |
| 自作農·小作農 | 水利 組合費와 肥料 代金을 負擔. 빚을 지고 土地를 잃어 自作農이 小作農으로, 小作農이 火田民이나 移住民으로 轉落 |
| 農業 構造 | 稻作 中心의 單作化가 進行되어 쌀값 變動에 脆弱해짐 |
小作爭議가 頻繁해졌고, 沒落한 農民은 滿洲와 日本으로 移住했습니다. 計劃은 1930秊代 初 大恐慌으로 쌀값이 暴落하고, 朝鮮 쌀의 流入에 日本 農民이 反發하면서 1934秊 中斷되었습니다.
日本 資本의 進出
| 措置 | 內容과 影響 |
|---|---|
| 會社令 廢止(1920) | 許可制 → 申告制. 日本은 大戰 好景氣로 蓄積한 資本의 投資處가 必要했음. 民族 資本도 成長의 餘地가 생겼으나 規模와 技術에서 劣勢였고, 日本 資本이 大擧 流入 |
| 關稅 撤廢(1923) | 一部 品目을 除外한 日本 商品의 關稅를 없앰. 값싼 日本 商品이 들어와 國內 産業 打擊 → 物産 奬勵 運動 展開 |
| 新銀行令(1928) | 銀行의 最低 資本金을 높여 韓國人 所有 中小 銀行을 合倂시킴. 金融 支配 强化 |
| 咸鏡線 開通(1928) | 京釜線·京義線과 湖南線·京元線·咸鏡線이 이어져 이른바 X字 鐵道網 完成. 北部 資源과 大陸 連結 |
物産 奬勵 運動의 標語 "내 살림 내 것으로"는 關稅 撤廢 以後 朝鮮 市場이 日本 商品에 完全히 열린 狀況을 反映합니다. 그러나 國産品 需要가 늘자 商品 價格이 오르고 利益이 韓國人 資本家에게 돌아간다는 社會主義 陣營의 批判도 받았습니다.
1930秊代 以後 民族 抹殺 統治
兵站基地化 政策
大恐慌의 打開策으로 日帝는 日本–朝鮮–滿洲를 하나의 經濟 블록으로 묶으려 했습니다. 宇垣一成 總督(在任 1931–1936)은 南部에서는 綿花 栽培를, 北部에서는 羊 飼育을 强要하는 南綿北羊 政策을 펴서 日本 纖維 工業의 原料를 朝鮮에서 調達했습니다.
中日 戰爭을 앞두고 赴任한 南次郞 總督(在任 1936–1942)은 朝鮮을 大陸 侵略의 前進 兵站基地로 規定하고, 軍需 物資를 生産하는 基地로 再編했습니다.
北部에서는 豐富한 地下 資源과 水力 電力을 利用한 重化學 工業이 發達했습니다. 野口遵가 興南에 세운 朝鮮窒素肥料(1927 設立)를 中心으로 한 巨大 工業 地帶, 鴨綠江의 水豐 發電所가 그 代表입니다. 南部에는 紡織 等 輕工業이 配置되었습니다.
이 工業化는 日本의 財閥이 主導했고, 技術과 經營은 日本人이, 單純 勞動은 韓國人이 맡는 構造였습니다. 朝鮮 內部의 産業 聯關보다는 日本 經濟와 戰爭의 必要에 맞춰 配置되었기 때문에, 解放과 分斷 뒤에는 重工業은 北에, 輕工業과 農業은 南에 쏠린 歪曲된 經濟 構造로 남았습니다.
農村 振興 運動과 朝鮮 農地令
大恐慌으로 農産物 價格이 暴落하고 小作爭議가 激化되자, 日帝는 農村 振興 運動(1932–1940)을 推進했습니다. 標語는 自力更生이었습니다. 農家마다 營農 計劃을 세우게 하고 節約과 勤勉을 督勵했는데, 이는 貧困의 原因을 地主制와 收奪이라는 構造가 아니라 農民 個人의 精神과 生活 態度에서 찾는 論理였습니다. 運動은 官이 農村의 末端까지 統制하는 組織網을 만들어, 뒤의 戰時 動員 體制의 基盤이 되었습니다.
小作 關係의 不安을 누그러뜨리기 爲해 朝鮮 農地令(1934)도 制定했습니다.
小作의 期間은 3秊보다 짧게 정할 수 없다.
— 「朝鮮 農地令」(1934)
小作 期間을 保障하고 地主의 一方的 小作權 移動을 制限한 것은 農民에게 一定한 保護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小作料의 上限은 정하지 않았고 地主制 自體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農民의 不滿을 體制 內部로 吸收해 社會主義 系列의 革命的 農民 運動을 막으려는 性格이 강했습니다.
皇國 臣民化 政策
中日 戰爭 以後 韓國人을 戰爭에 動員하려면 民族 意識 自體를 지워야 했습니다. 日帝는 日本과 朝鮮이 하나라는 內鮮一體, 두 民族의 祖上이 같다는 日鮮同祖論을 내세워 同化를 强要했습니다.
하나, 우리는 大日本 帝國의 臣民입니다.
둘,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天皇 陛下께 忠義를 다합니다.
셋, 우리는 忍苦 鍛鍊하여 훌륭하고 强한 國民이 되겠습니다.
— 「皇國 臣民의 誓詞」(兒童用, 1937)
學校와 官公署, 各種 集會에서는 誓詞 暗誦, 日本 皇居를 向해 절하는 宮城 遙拜, 神社 參拜가 强要되었습니다. 神社 參拜를 拒否한 基督敎 系統 學校는 廢校되기도 했습니다.
1939秊에는 朝鮮 民事令을 改正해 創氏改名을 施行했습니다.
朝鮮人 戶主는 本令 施行 後 6個月 以內에 새로 氏를 정하여 이를 府尹 또는 邑面長에게 申告해야 한다.
— 「朝鮮 民事令」 改正 附則(1939, 1940秊 施行)
條文은 申告의 形式을 취했지만, 申告하지 않은 者에게는 子女의 入學 拒否, 行政 機關의 事務 處理 拒否, 食糧 配給 除外 等 不利益이 따랐습니다. 申告 期間이 끝날 무렵 全體 戶의 約 80% 以上이 新氏를 申告했습니다. 形式上의 自發性과 實質的 强制 사이의 隔差를 보여 주는 事例입니다.
言語와 言論에 對한 彈壓도 段階的으로 强化되었습니다.
| 秊度 | 內容 |
|---|---|
| 1938 | 第3次 朝鮮 敎育令. 朝鮮語를 必修에서 隨意 科目으로 轉換. 學校 名稱과 敎育 內容을 日本人 學校와 統一 |
| 1940 | 朝鮮日報·東亞日報 廢刊 |
| 1941 | 國民 學校令. 小學校를 '皇國 臣民의 學校'라는 意味의 國民 學校로 바꾸고, 敎科 課程에서 朝鮮語를 除外 |
| 1942 | 朝鮮語 學會 事件. 『朝鮮語 大辭典』을 編纂하던 學者들을 治安維持法 違反으로 檢擧 |
| 1943 | 第4次 朝鮮 敎育令. 修業 秊限 短縮 等 敎育을 戰時 體制로 改編 |
用語 '民族 抹殺 統治'는 韓國의 敎科書에서 主로 쓰는 表現입니다. 學界에서는 日帝가 내건 名稱을 批判的으로 引用해 '皇國 臣民化 政策', 動員의 側面을 强調해 '戰時 動員 體制'라고도 부릅니다.
國家總動員法(1938)과 人力·物資 收奪
國家總動員法이 朝鮮에도 適用되면서, 收奪은 法에 根據를 둔 制度가 되었습니다.
第1條 本法에서 國家總動員이라 함은 戰時에 國防 目的 達成을 爲하여 國의 全力을 가장 有效하게 發揮하도록 人的 및 物的 資源을 統制·運用함을 말한다.
第4條 政府는 戰時에 國家總動員上 必要할 때에는 勅令이 정하는 바에 따라 帝國 臣民을 徵用하여 總動員 業務에 從事하게 할 수 있다.
— 「國家總動員法」(1938)
具體的인 內容을 勅令에 委任했기 때문에, 政府는 議會를 거치지 않고 動員의 範圍를 無制限으로 넓힐 수 있었습니다.
| 區分 | 主要 內容 |
|---|---|
| 兵力 | 陸軍 特別 志願兵制(1938) → 學徒 志願兵制(1943) → 徵兵制(1944 施行). '志願'에도 行政 組織을 通한 事實上의 强要가 動員됨 |
| 勞動力 | 募集(1939) → 官 斡旋(1942) → 國民 徵用令에 따른 徵用(1944 本格化). 日本·朝鮮·南洋의 鑛山·軍需 工場·飛行場 建設 現場 等에 動員 |
| 女性 勤勞 | 女子 挺身 勤勞令(1944). 女性을 軍需 工場 勞動에 動員 |
| 日本軍 '慰安婦' | 法令이 아니라 軍의 要請과 關與 아래 就業 詐欺, 人身賣買, 强制 連行 等으로 動員. 軍 慰安所에서 性的 暴力을 당함. 勤勞 挺身隊와는 別個의 被害 |
| 物資 | 米穀 供出과 食糧 配給制, 金屬類 回收(食器·祭器·農器具까지 對象), 國防 獻金 强要 |
産米 增殖 計劃도 朝鮮 增米 計劃(1940–)으로 再開되었습니다. 1920秊代에는 쌀이 市場을 通해 日本으로 搬出되었지만, 이제는 政府가 정한 價格과 數量으로 强制 買入하는 供出이라는 直接的 收奪 方式을 취했습니다.
硏究의 爭點
植民地 時期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學界에는 論爭이 있습니다.
| 立場 | 主張 | 批判 |
|---|---|---|
| 收奪論 | 日帝의 政策은 收奪이 本質이며, 植民地 時期는 韓國의 自生的 發展이 가로막힌 時期 | 植民地 時期의 經濟 變化와 韓國人의 主體的 對應을 充分히 說明하지 못함 |
| 植民地 近代化論 | 鐵道·法制·工業 等 近代的 制度와 施設이 導入되었고 生産 指標가 成長했으며, 이것이 解放 뒤 經濟 成長의 土臺가 됨 | 成長의 果實이 民族別·階層別로 어떻게 나뉘었는지, 1人當 쌀 消費量 減少 같은 生活 水準의 惡化를 看過함 |
| 植民地 近代性論 | 收奪과 近代化의 兩者 擇一을 넘어, 植民地 權力이 만든 近代가 어떤 差別과 規律을 同伴했는지에 注目 | 收奪의 暴力性을 相對化할 수 있다는 憂慮 |
史料와 統計를 읽을 때에는 成長과 變化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를 爲한 것이었고 누가 그 費用을 치렀는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整理
| 時期 | 國際 情勢 | 統治 方式 | 主要 法令·制度 | 經濟 政策 |
|---|---|---|---|---|
| 1910秊代 | 列强이 서로의 植民地 支配를 容認 | 武斷 統治 | 總督府 官制, 憲兵 警察, 笞刑令, 第1次 敎育令 | 土地 調査 事業, 會社令 |
| 1920秊代 | 民族自決主義 擴散, 워싱턴 體制의 國際 協調, 大正 데모크라시 | 文化 統治(民族 分裂 統治) | 普通 警察, 第2次 敎育令, 治安維持法 | 産米 增殖 計劃, 會社令 廢止, 關稅 撤廢 |
| 1930秊代 以後 | 大恐慌과 블록 經濟, 軍部 擡頭, 侵略 戰爭 擴大 | 民族 抹殺 統治(皇國 臣民化) | 皇國 臣民 誓詞, 創氏改名, 國家總動員法 | 南綿北羊, 兵站基地化, 供出과 配給 |
日帝의 統治는 國際 秩序와 日本 自身의 必要에 따라 武斷에서 懷柔로, 다시 總動員으로 外形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同化를 要求하면서 權利는 주지 않는 構造, 總督에게 集中된 權力, 그리고 朝鮮의 人力과 資源을 日本을 爲해 쓰는 方向은 35秊 동안 바뀌지 않았습니다. 法令과 統計를 읽을 때 標榜된 名分과 條文·數値가 어디서 어긋나는지를 살피면 그 構造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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