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後期의 變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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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 後期의 變化(1-01-04)는 朝鮮 前期의 收取 體制와 身分制(1-02-02·03)를 前提로 하므로, 主題別 單元 뒤에 읽는 順序로 이었습니다.
■ 10韓史1-01-04: 朝鮮 後期에 登場한 새로운 變化 樣相을 理解한다.
變化의 出發點
兩亂 以後의 朝鮮
16世紀 末에서 17世紀 前半에 걸친 倭亂과 胡亂은 朝鮮 社會에 큰 傷處를 남겼습니다. 人口가 크게 줄고 農土가 荒廢해졌으며, 土地 臺帳과 戶籍이 불타 國家가 稅金을 거둘 根據가 흔들렸습니다. 壬辰倭亂 直前 150萬 結 안팎이던 耕地 가운데 戰爭 直後 國家가 把握한 것은 그 절반에도 못 미쳤다고 傳해집니다. 戰爭 中 不足한 軍糧과 軍功을 메우려고 돈이나 穀食을 받고 官職이나 免賤의 文書를 내준 일은 身分 秩序에도 금을 냈습니다.
朝鮮 後期의 變化는 이 復舊 過程에서 始作되었습니다. 國家는 稅制를 고쳐 財政을 再建하려 했고, 農民은 生産力을 높여 살길을 찾았으며, 그 過程에서 쌓인 富가 商業과 手工業을 刺戟했습니다. 經濟의 變化는 身分 秩序를 흔들었고, 흔들리는 秩序 속에서 새로운 學問과 文化와 信仰이 나타났습니다. 朝鮮 後期의 여러 變化는 따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로 原因과 結果로 얽혀 있습니다. 黨派 사이의 對立과 蕩平, 勢道 政治로 이어지는 政治 運營의 變化는 따로 다루어야 할 主題이므로, 여기서는 經濟·社會·文化의 變化를 中心으로 살펴봅니다.
收取 體制의 改編
兩亂 以後 國家는 稅金 制度를 차례로 고쳤습니다. 1635秊 永定法은 田稅를 豐凶에 關係없이 土地 1結當 쌀 4~6斗로 固定했습니다. 地方의 特産物을 바치던 貢納은 大同法으로 바뀌었습니다. 貢納은 稅의 負擔이 家戶마다 매겨지고 實物로 내야 했기 때문에, 物品을 代身 바치고 몇 倍의 代價를 받아 내는 防納의 弊害가 컸습니다. 大同法은 이를 土地 1結當 쌀 12斗 程度로 바꾸어, 土地가 많은 사람이 더 내도록 하고 實物 代身 쌀·布·돈으로 내게 했습니다. 1608秊 京畿道에서 始作된 大同法은 地主들의 反對로 100秊이 걸려 1708秊에야 平安道와 咸鏡道를 除外한 全國으로 擴大되었습니다. 1750秊 均役法은 1秊에 軍布 2疋을 내던 負擔을 1疋로 줄였습니다.
이 改編의 共通點은 사람이나 家戶에 매기던 稅를 土地에 매기는 方向으로, 實物로 내던 稅를 쌀과 돈으로 내는 方向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이 가운데 大同法은 뜻밖의 結果를 낳았습니다. 國家가 쌀로 稅를 걷으니, 궁궐과 官廳에 必要한 物品은 누군가가 市場에서 사다 바쳐야 했습니다. 이 일을 맡은 商人을 貢人이라 하는데, 貢人은 官廳에서 미리 代價를 받아 物品을 大量으로 사들였으므로 商業과 手工業의 큰 需要者가 되었습니다. 稅金 制度의 改革이 商品 經濟를 키운 것입니다.
均役法으로 줄어든 軍布 收入은 다른 곳에서 메워야 했습니다. 政府는 平安道와 咸鏡道를 除外한 地方의 土地에 1結當 쌀 2斗나 돈 5錢을 結作으로 매기고, 軍役을 피해 오던 一部 富裕한 良人에게 選武軍官이라는 稱號를 주는 대신 해마다 布 1疋을 걷었습니다(選武軍官布). 王室과 宮房이 차지하던 漁場·鹽田·船舶의 稅, 곧 魚鹽船稅도 國家 財政으로 돌려 새로 둔 均役廳이 管理하게 했습니다. 이 가운데 結作이 補充 財源의 半 以上을 차지했는데, 사람에게 매기던 軍役의 負擔 一部를 土地 所有者에게 옮겼다는 點에서 大同法과 같은 方向의 改革이었습니다.
그러나 均役法은 軍役 制度 自體를 고치지는 못했습니다. 軍布는 實際로는 사람마다가 아니라 고을과 마을 單位로 定해진 額數를 채우는 方式으로 걷혔기 때문에, 逃亡하거나 죽은 사람의 몫을 이웃에게(隣徵), 親族에게(族徵) 물리고, 죽은 사람(白骨徵布)이나 어린아이(黃口簽丁)에게까지 軍布를 매기는 弊端이 이어졌습니다. 地主가 結作의 負擔을 小作農에게 떠넘기는 일도 있었고, 地方 官廳의 財源 一部가 均役廳으로 옮겨지자 고을마다 따로 稅를 더 걷는 일이 생겼습니다. 田稅 亦是 永定法으로 稅率은 낮아졌지만 여러 附加稅와 手數料가 덧붙어 農民의 實際 負擔은 크게 줄지 않았습니다. 稅를 土地와 쌀로 一元化하려던 改革이 現場에서 이렇게 어그러지면서 쌓인 收取의 紊亂이, 19世紀 田政·軍政·還穀의 三政 紊亂으로 이어져 아래 「農民 蜂起」의 背景이 됩니다.
農業의 變化
移秧法의 擴散
朝鮮 後期 農業의 가장 큰 變化는 移秧法, 곧 모내기의 擴散입니다. 볍씨를 논에 바로 뿌리는 直播法과 달리, 移秧法은 못자리에서 모를 키운 뒤 논에 옮겨 심습니다. 移秧法에는 세 가지 長點이 있었습니다. 모를 옮겨 심으므로 김매기의 勞動力이 크게 줄었고, 튼튼한 모만 골라 심으니 收穫量이 늘었으며, 모를 기르는 동안 논에 보리를 키울 수 있어 벼와 보리의 二毛作이 可能해졌습니다.
移秧法은 朝鮮 前期에도 알려져 있었지만 國家는 이를 禁止했습니다. 모를 옮겨 심는 時期에 비가 오지 않으면 그해 農事를 完全히 망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朝鮮 後期에 移秧法이 全國으로 퍼진 것은 堤堰과 洑 같은 水利 施設이 늘어 물을 確保하기 쉬워진 德分이었습니다. 特히 二毛作의 보리는 地主에게 바치는 小作料에 包含되지 않는 境遇가 많아 小作農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밭農事에서는 이랑 사이의 고랑에 씨를 뿌리는 畎種法이 퍼져, 바람과 가뭄에 强해지고 收穫이 늘었습니다.
廣作과 農民의 分化
김매기 勞動이 줄자 한 집이 經營할 수 있는 땅이 넓어졌습니다. 自身의 땅이나 빌린 땅을 넓게 經營하는 廣作이 나타났고, 一部 農民은 시장에 내다 팔 商品 作物을 길러 富를 쌓았습니다. 人蔘·담배·木花·채소 같은 作物은 쌀보다 훨씬 높은 收益을 냈습니다. 이렇게 農業 經營으로 富를 쌓은 農民을 經營型 富農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反面 廣作이 늘어나자 빌릴 땅이 줄어든 小作農은 땅을 잃고 品팔이 勞動者가 되거나 都市와 鑛山으로 흘러갔습니다. 같은 技術의 變化가 한쪽에는 富의 機會를, 다른 쪽에는 몰락을 가져온 것입니다. 小作料를 내는 方式도 바뀌어, 收穫의 절반을 나누던 打租法 代身 一定한 額數를 미리 정해 내는 賭租法이 一部 地域에서 퍼졌습니다. 賭租法에서는 收穫을 늘린 만큼 小作人의 몫이 커지므로 農民이 生産을 늘릴 動機가 생겼습니다.
商品 貨幣 經濟의 發達
商人의 成長
農業 生産이 늘고 貢人이 物品을 大量으로 사들이면서 商業이 크게 發達했습니다. 朝鮮 前期의 商業은 國家가 許可한 市廛 商人이 中心이었고, 市廛은 許可받지 않은 商人을 團束할 수 있는 禁亂廛權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朝鮮 後期에는 國家의 統制 밖에서 活動하는 私商이 成長했습니다.
| 商人 | 中心地 | 活動 |
|---|---|---|
| 京江商人 | 漢江 | 稅穀과 物資를 船舶으로 運送하고 穀食·소금·魚物을 去來. 造船業에도 進出 |
| 松商 | 開城 | 全國에 松房이라는 支店을 두고 人蔘을 栽培·加工해 淸·日本과 交易 |
| 灣商 | 義州 | 淸과의 貿易 |
| 萊商 | 東萊 | 日本과의 貿易 |
私商이 커지자 市廛과의 葛藤도 깊어졌습니다. 1791秊 正祖는 六矣廛을 除外한 市廛의 禁亂廛權을 廢止했는데(辛亥通共), 이로써 漢陽에서 누구나 自由롭게 商業을 할 수 있는 길이 넓어졌습니다.
私商 가운데 一部는 큰 資本으로 特定 物品을 한꺼번에 사들여 값을 올린 뒤 되파는 都賈로 成長했습니다. 都賈는 市廛의 特權을 무너뜨린 私商이 스스로 새로운 獨占을 만든 것이어서, 小商人과 消費者에게는 또 다른 負擔이 되었습니다. 對外 貿易에서도 國家가 認定한 公式 貿易인 開市 밖에서 私貿易인 後市가 커졌습니다. 淸과의 國境에서는 義州 近處 鴨綠江의 中江과, 使臣이 淸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鳳凰城 近處의 柵門에서 私貿易이 벌어졌는데(中江 後市, 柵門 後市), 그 中心이 義州의 灣商이었습니다. 日本과는 東萊의 倭館에서 交易이 이루어졌고 萊商이 이를 맡았습니다. 開城의 松商은 全國의 松房을 통해 모은 人蔘을 들고 灣商·萊商과 이어져, 日本에서 들어온 銀으로 淸의 비단 等을 사서 다시 日本에 파는 中繼 貿易의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이 交易이 世界의 銀 흐름과 어떻게 맞물렸는지는 「世界的 商品 交易과 社會 變化」에서 다룹니다.
場市와 浦口
地方에서는 場市가 늘었습니다. 15世紀 末 全羅道에서 처음 나타난 場市는 18世紀 中葉에는 全國에 1,000곳이 넘었고, 대개 5日마다 열려 이웃 場市와 연결되었습니다. 場市를 돌며 物件을 파는 褓負商은 地方의 場市를 하나의 流通網으로 묶었습니다. 江과 바다가 만나는 浦口는 物資가 모이는 商業의 中心이 되었고, 浦口에서는 客主와 旅閣이 商品의 委託 販賣, 保管, 運送, 宿泊, 金融까지 맡았습니다.
貨幣의 流通
商業이 發達하자 貨幣가 널리 쓰였습니다. 1678秊 肅宗 때 常平通寶가 法定 貨幣로 定해진 뒤 全國에 流通되어, 稅金과 小作料를 돈으로 내는 일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貨幣가 늘어나자 富者들이 돈을 쌓아 두거나 高利貸에 쓰면서 市中에 돈이 不足해지는 錢荒이 나타났습니다. 李瀷은 錢荒과 高利貸의 弊害를 들어 貨幣를 없애자는 廢錢論을 펴기도 했습니다. 反面 朴齊家는 消費가 生産을 이끈다는 觀點에서 商業과 流通을 積極的으로 키워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무릇 財物은 比喩하자면 우물과 같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
— 朴齊家, 「北學議」
手工業과 鑛業
手工業에서도 國家의 統制가 느슨해졌습니다. 朝鮮 前期에는 官廳에 登錄된 匠人이 官에 必要한 物品을 만드는 官營 手工業이 中心이었지만, 後期에는 匠人이 稅金만 내고 自由롭게 物品을 만들어 파는 民營 手工業이 커졌습니다. 商人이 原料와 資金을 미리 대 주고 製品을 넘겨받는 先貸制가 퍼졌다가, 漸次 匠人이 스스로 原料를 사서 만들고 파는 獨立 手工業者도 나타났습니다.
鑛業에서는 1651秊 民間의 採掘을 許可하고 稅金을 거두는 設店收稅制가 始作되었습니다. 18世紀에는 商人이 資本을 대고 鑛山 經營을 專門으로 하는 德大가 일꾼을 雇傭해 採掘하는 方式이 나타났습니다. 國家의 許可 없이 몰래 캐는 潛採도 盛行했습니다. 淸과의 貿易에서 銀의 需要가 크고 商品 作物과 手工業의 發達로 原料의 需要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身分 秩序의 動搖
兩班의 增加와 分化
經濟의 變化는 身分 構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大邱 地域의 戶籍을 分析한 硏究는 그 變化를 잘 보여 줍니다.
| 時期 | 兩班 | 常民 | 奴婢 |
|---|---|---|---|
| 1690秊 | 9.2% | 53.7% | 37.1% |
| 1729秊 | 18.7% | 54.6% | 26.6% |
| 1783秊 | 37.5% | 57.5% | 5.0% |
| 1858秊 | 70.3% | 28.2% | 1.5% |
170秊 사이에 兩班의 比率이 7倍 넘게 늘고 奴婢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 數値를 兩班이 實際로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富를 쌓은 常民이 돈을 내고 官職을 사는 納粟이나 이름이 비어 있는 任命 文書인 空名帖을 사들이고, 族譜를 사거나 꾸며 兩班을 自稱했기 때문입니다. 兩班이 되면 軍役을 면하고 社會적 待遇가 달라졌으므로 兩班의 身分을 얻으려는 欲求가 매우 컸습니다. 戶籍上 兩班이 늘어난 것은 兩班이라는 身分이 더 以上 出生으로만 정해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와 同時에 兩班 內部의 分化도 일어났습니다. 黨爭에서 밀려나 官職에 오르지 못한 兩班이 늘어났고, 그 가운데 經濟적으로 몰락한 兩班은 直接 農事를 짓거나 商業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런 몰락 兩班을 殘班이라 불렀습니다. 權力을 쥔 少數 家門과 이름뿐인 多數의 兩班으로 兩班層이 갈라진 것입니다.
中人과 庶孼의 地位 向上 運動
中人과 庶孼도 身分 上昇을 꾀했습니다. 兩班의 妾에게서 난 庶孼은 文科 應試와 高位 官職 進出이 制限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集團으로 上疏를 올려 制限을 풀어 달라고 要求했습니다. 正祖는 學識이 뛰어난 庶孼 出身 朴齊家·李德懋·柳得恭 等을 奎章閣 檢書官으로 登用했고, 1851秊에는 庶孼의 淸要職 進出 制限이 大部分 풀렸습니다.
譯官·醫官 等 技術職에 從事한 中人은 外國과의 貿易과 專門 知識으로 富와 敎養을 쌓았습니다. 이들은 庶孼의 動向에 刺戟받아 淸要職 進出을 要求하는 運動을 벌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中人들은 詩社를 만들어 文學 活動을 벌이는 等 兩班 文化에 버금가는 文化的 力量을 보여 주었고, 譯官들은 淸을 오가며 새로운 文物과 情報를 들여와 開化 思想의 形成에도 影響을 주었습니다.
奴婢의 減少
奴婢는 여러 經路로 줄어들었습니다. 軍功이나 納粟으로 免賤하는 사람, 逃亡해 身分을 숨기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國家의 立場에서도 奴婢는 稅金과 軍役을 지지 않으므로, 奴婢가 줄고 良人이 늘어야 財政에 有利했습니다. 1731秊 英祖는 어머니가 奴婢일 때만 子女를 奴婢로 삼는 奴婢從母法을 確定해, 父母 가운데 한쪽만 奴婢여도 子女가 奴婢가 되던 慣行을 바꾸었습니다. 1801秊에는 中央 官廳에 屬한 公奴婢 6萬 6千餘 名을 良人으로 풀어 주었습니다. 私奴婢는 이후에도 남았지만, 奴婢의 世襲은 1886秊에 廢止되었고 身分制 自體는 1894秊 甲午改革으로 法的으로 廢止되었습니다.
鄕村 秩序와 家族 制度의 變化
地方 社會에서도 秩序가 바뀌었습니다. 朝鮮 前期에는 在地 士族이 鄕案에 이름을 올리고 鄕會를 通해 地方의 일을 主導했습니다. 그러나 後期에는 富를 쌓아 새로 兩班이 된 新鄕이 鄕案에 들어오려 하면서, 旣存 兩班인 舊鄕과 新鄕이 鄕村의 主導權을 놓고 다투는 鄕戰이 벌어졌습니다. 國家는 新鄕을 끌어들여 士族의 影響力을 누르고 守令과 鄕吏를 通한 地方 統制를 强化했습니다. 鄕會는 自治 機構에서 守令이 稅金 割當을 諮問하는 機構로 바뀌었고, 守令과 鄕吏의 權限이 커진 만큼 이들의 收奪도 심해졌습니다.
家族 制度는 父系 中心으로 바뀌었습니다. 朝鮮 前期까지는 婚姻한 男子가 한동안 妻家에서 사는 일이 흔했고, 財産은 아들과 딸에게 고르게 相續되었으며, 祭祀도 子女가 돌아가며 맡았습니다. 그러나 17世紀 以後 性理學의 宗法 秩序가 生活 속으로 퍼지면서, 婚禮 뒤 新婦가 곧바로 男便의 집으로 들어가는 親迎이 퍼지고, 長男이 祭祀를 맡으며 財産도 長男 中心으로 相續되었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養子를 들였고, 같은 姓氏가 모여 사는 同姓 마을과 族譜 編纂이 늘었습니다. 오늘날 '傳統'으로 여겨지는 家族 慣行의 相當 部分은 이 時期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새로운 學問
實學
兩亂 以後 社會 問題가 쌓이자, 性理學의 理論 論爭에서 벗어나 現實의 問題를 解決하려는 學問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實學이라 합니다. 實學者들은 經世致用과 利用厚生, 實事求是를 내세웠는데, 무엇을 中心 問題로 보았느냐에 따라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뉩니다.
| 區分 | 農業 中心 改革論 | 商工業 中心 改革論 |
|---|---|---|
| 問題 意識 | 土地 集中으로 農民이 몰락함 | 生産과 流通이 막혀 나라가 가난함 |
| 主張 | 土地 制度를 고쳐 自營農을 育成 | 商工業 振興, 技術 革新, 淸의 文物 受容(北學) |
| 主要 學者 | 柳馨遠, 李瀷, 丁若鏞 | 柳壽垣, 洪大容, 朴趾源, 朴齊家 |
農業 中心 改革論者들이 내놓은 土地 分配의 構想과 그 基準의 差異는 「正義」에서 다루었습니다. 이들은 土地뿐 아니라 科擧와 兵役, 官僚 制度까지 함께 고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丁若鏞은 「牧民心書」에서 地方 守令이 지켜야 할 道理를, 「經世遺表」에서 國家 制度 全般의 改革案을 내놓았습니다.
商工業 中心 改革論者들은 淸을 오랑캐로 여기며 排斥하던 當時의 風潮를 批判했습니다. 柳壽垣은 「迂書」에서 士農工商이 職業의 差異일 뿐이라며 兩班도 商工業에 從事해야 한다고 主張했습니다. 洪大容은 「醫山問答」에서 地球가 돈다는 地轉說과 宇宙가 끝이 없다는 無限 宇宙論을 펼쳐, 中國이 世界의 中心이라는 華夷觀을 根本부터 흔들었습니다. 朴趾源은 「熱河日記」에서 淸에서 본 수레와 船舶, 벽돌과 貨幣의 쓰임을 紹介하며 그 利用을 主張했고, 朴齊家는 「北學議」에서 앞에서 본 우물의 比喩로 消費를 통한 生産의 刺戟을 强調했습니다.
國學
自國의 歷史와 地理, 言語에 對한 關心도 높아졌습니다. 安鼎福의 「東史綱目」은 檀君 朝鮮에서 高麗 末까지의 歷史를 體系的으로 整理했고, 柳得恭의 「渤海考」는 渤海를 우리 歷史로 보고 統一 新羅와 渤海의 時代를 南北國 時代로 부르자고 提案했습니다. 李重煥의 「擇里志」는 各 地域의 自然과 人物, 風俗을 살펴 살 만한 곳의 條件을 論했고, 金正浩는 1861秊 全國을 22帖으로 나누어 접고 펼 수 있게 만든 「大東輿地圖」를 펴냈습니다. 中國 中心의 世界觀에서 벗어나 自己 自身을 客觀的으로 보려는 意識이 學問 全般에 나타난 것입니다.
庶民 文化의 發達
商品 經濟가 發達하고 書堂 敎育이 퍼지면서 文化를 누리는 主體가 兩班에서 庶民으로 넓어졌습니다. 庶民이 즐기는 文化는 兩班 社會의 僞善을 諷刺하고 人間의 感情을 率直하게 드러내는 特徵이 있었습니다.
文學에서는 한글 小說이 널리 읽혔습니다. 「春香傳」 같은 作品은 身分을 넘어선 사랑과 貪官汚吏에 對한 批判을 담았습니다. 책을 빌려주는 貰冊店이 생기고, 市場에서 小說을 소리 내어 읽어 주는 傳奇叟라는 職業도 나타났습니다. 詩歌에서는 定型을 벗어나 길이가 自由롭고 日常의 感情을 거침없이 表現한 辭說時調가 流行했습니다.
公演 藝術에서는 판소리와 탈춤이 人氣를 끌었습니다. 판소리는 소리꾼이 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이야기를 노래와 말로 엮어 가는 藝術로, 19世紀에 申在孝가 辭說을 整理했습니다. 탈춤과 山臺놀이는 場市와 마을에서 公演되며 兩班과 破戒僧을 웃음거리로 삼았습니다.
繪畫에서는 우리 自然을 直接 보고 그리는 眞景 山水畫가 鄭敾에 依해 開拓되었습니다. 中國의 그림을 본뜨던 觀念 山水畫에서 벗어나 「仁王霽色圖」 「金剛全圖」처럼 實際 風景을 그린 것입니다. 金弘道는 서당·씨름·빨래터 같은 庶民의 日常을, 申潤福은 都市 兩班과 女性의 風流를 그린 風俗畫를 남겼습니다. 이름 없는 畫家들이 그린 民畫는 長壽와 福을 비는 庶民의 所望을 담아 집 안을 裝飾했습니다.
새로운 信仰과 社會 不安
天主敎
天主敎는 17世紀 淸을 다녀온 使臣들을 通해 西學이라는 學問으로 먼저 紹介되었습니다. 18世紀 後半 一部 南人 學者들이 이를 信仰으로 받아들였고, 1784秊 李承薰이 北京에서 洗禮를 받고 돌아와 信仰 共同體가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平等하다는 가르침은 身分 差別에 시달리던 中人과 常民, 女性들 사이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天主敎는 祖上에 對한 祭祀를 偶像 崇拜로 보아 禁止했으므로, 儒敎 倫理와 正面으로 衝突했습니다. 1791秊 全羅道 珍山의 尹持忠이 어머니의 祭祀를 지내지 않고 神主를 불태운 事件으로 處刑되었고(辛亥迫害), 1801秊 純祖가 卽位한 뒤에는 大規模 迫害가 일어나 李承薰과 丁若鍾 等이 處刑되고 丁若銓·丁若鏞 兄弟가 流配되었습니다(辛酉迫害). 이 迫害는 天主敎를 받아들였던 南人 勢力을 政治的으로 除去하는 意味도 있었습니다.
東學
1860秊 慶州의 몰락 兩班 崔濟愚는 東學을 創始했습니다. 西學에 맞선다는 뜻을 이름에 담았고, 儒·佛·仙의 思想과 民間 信仰을 아울렀습니다. 東學은 사람이 마음속에 하늘님을 모신다는 侍天主를 내세워 모든 사람이 平等하다고 가르쳤고, 世上이 뒤바뀌어 새 時代가 열린다는 後天開闢을 말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收奪과 身分 差別에 시달리던 農民에게 빠르게 퍼졌습니다. 政府는 東學을 世上을 어지럽히는 邪敎로 보아 1864秊 崔濟愚를 處刑했지만, 2代 敎主 崔時亨이 敎理를 「東經大全」과 「龍潭遺詞」로 整理하고 敎團을 再建해 勢力을 넓혀 갔습니다.
이 時期에는 鄭氏 姓을 가진 眞人이 나타나 새 王朝를 세운다는 「鄭鑑錄」 같은 豫言書와, 未來의 부처가 나타나 百姓을 구한다는 彌勒 信仰도 民間에 퍼졌습니다. 現實의 秩序에 對한 不信이 새로운 世上에 對한 期待로 나타난 것입니다.
農民 蜂起
19世紀에 들어 少數 家門이 權力을 獨占하는 勢道 政治가 이어지면서 官職을 사고파는 일이 盛行했고, 官職을 산 守令과 鄕吏는 田政·軍政·還穀의 三政을 通해 農民을 收奪했습니다. 農民들은 처음에는 訴狀을 올리거나 壁書를 붙이고 逃亡하는 方式으로 抵抗했지만, 漸次 武裝 蜂起로 나아갔습니다.
1811秊 平安道에서는 몰락 兩班 洪景來가 蜂起를 이끌었습니다. 平安道는 淸과의 貿易으로 商業이 發達한 地域이었지만 中央 官職 進出에서 差別받았고, 蜂起에는 몰락 兩班과 商人, 鑛山 勞動者, 農民이 함께 參與했습니다. 蜂起軍은 한때 淸川江 以北을 占領했으나 定州城에서 鎭壓되었습니다(洪景來의 亂).
1862秊에는 慶尙道 晉州에서 右兵使 白樂莘의 收奪에 맞서 農民들이 蜂起한 것을 始作으로, 三南 地方을 中心으로 70餘 곳에서 蜂起가 잇따랐습니다(壬戌 農民 蜂起). 政府는 三政의 弊端을 고치겠다며 三政釐整廳을 設置했으나 곧 廢止했습니다. 이 蜂起들은 鎭壓되었지만, 農民이 自身의 處地를 自覺하고 集團으로 行動하는 經驗을 쌓았다는 點에서 뒷날 더 큰 農民 運動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整理
| 領域 | 變化 |
|---|---|
| 收取 體制 | 永定法, 大同法, 均役法. 人頭稅·實物 中心에서 土地稅·쌀과 돈 中心으로. 貢人의 登場 |
| 農業 | 移秧法과 二毛作, 畎種法. 廣作과 商品 作物 栽培. 農民의 分化. 打租法에서 賭租法으로 |
| 商工業 | 私商(京江商人·松商·灣商·萊商)의 成長, 辛亥通共, 場市와 浦口의 發達, 常平通寶의 流通. 民營 手工業과 先貸制, 設店收稅制와 德大 |
| 身分 | 兩班의 增加와 殘班의 出現, 庶孼·中人의 地位 向上 運動, 奴婢從母法과 公奴婢 解放 |
| 鄕村과 家族 | 新鄕과 舊鄕의 鄕戰, 守令·鄕吏 權限 强化. 親迎과 長子 中心 相續, 同姓 마을과 族譜 |
| 學問 | 實學(農業 中心·商工業 中心 改革論), 國學의 發達 |
| 文化 | 한글 小說, 辭說時調, 판소리, 탈춤, 眞景 山水畫, 風俗畫, 民畫 |
| 信仰과 抵抗 | 天主敎 傳來와 迫害, 東學 創始, 豫言 思想. 洪景來의 亂, 壬戌 農民 蜂起 |
朝鮮 後期의 變化는 戰爭의 傷處를 메우려는 收取 體制의 改編에서 始作해, 農業 生産力의 向上과 商品 貨幣 經濟의 發達로 이어졌습니다. 富를 쌓은 사람들은 身分의 壁을 넘으려 했고, 몰락한 사람들은 새로운 信仰과 蜂起에서 出口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變化는 國家 體制의 根本的인 改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實學者들의 改革論은 大部分 政策으로 採擇되지 않았고, 19世紀의 勢道 政治는 變化를 受容하기보다 收奪로 對應했습니다. 社會 內部에서 자라난 變化의 힘이 막힌 채로 朝鮮은 開港과 西勢東漸이라는 外部의 衝擊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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