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韓史2-02-03 • 民主化 運動
■ 10韓史2-02-03: 4·19 革命에서 6月 民主 抗爭에 이르는 民主化 過程을 探究한다.
李承晩 政權
拔萃 改憲, 四捨五入 改憲
大韓民國 政府가 세워질 때의 制憲 憲法은 大統領을 國會가 間接 選出하도록 했습니다. 李承晩은 이 方式으로는 再選이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制憲 國會 議員 다수가 反李承晩 性向을 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2秊 李承晩은 戰時 首都였던 釜山에서 戒嚴을 宣布하고 國會 議員을 拘束·脅迫해 大統領 直選制를 骨子로 하는 憲法 改正案을 통과시켰습니다. 政府가 낸 直選制 改憲案과 國會가 낸 內閣 責任制 改憲案을 뒤섞어 통과시켰다고 해서 拔萃 改憲이라 부릅니다. 釜山 政治 波動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改憲이 정상적인 節次가 아니라 暴力과 脅迫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줍니다.
이 直選制 憲法으로 1952秊 再選에 성공한 李承晩은 三選을 위한 障礙物과 다시 마주쳤습니다. 憲法이 大統領의 重任을 初代에 限해서만 制限 없이 許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4秊 政府는 '初代 大統領에 限하여 重任 制限을 撤廢한다'는 條項을 改憲案에 넣어 國會에 부쳤습니다. 表決 結果는 在籍 議員 203名 가운데 贊成 135票로, 改憲에 必要한 三分의 二에 未達했습니다. 政府·與黨은 四捨五入(반올림)의 原理를 끌어와 135.33을 반올림하면 135이므로 可決이라고 主張하며, 議決 定足數에 未達한 表決을 議決로 認定했습니다. 이를 四捨五入 改憲이라 부릅니다.
3·15 不正 選擧
1960秊 3月 15日 正·副統領 選擧를 앞두고 李承晩의 高齡이 問題로 떠올랐습니다. 大統領이 有故될 境遇 副統領이 職을 承繼하므로, 與黨 自由黨은 副統領 候補 李起鵬의 當選을 絶對 課題로 삼았습니다. 政府는 內務部 長官 崔仁圭를 통해 全國에 不正 選擧 指針을 내렸습니다. 投票函에 四割의 票를 미리 채워 넣는 事前 投票, 서너 명에서 아홉 명씩 組를 지어 投票所에 들어가 서로 監視하며 公開 投票하게 만든 三人組·九人組 投票, 野黨 參觀人을 投票所에서 쫓아내는 方式 등이 動員되었습니다.
이 不正이 露骨적으로 드러난 곳이 慶尙南道 馬山이었습니다. 選擧 當日 馬山 市民과 學生은 不正 選擧에 抗議하며 示威를 벌였고, 警察이 이에 發砲해 死傷者가 發生했습니다(馬山 一次 義擧).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 지난 4月 11日, 失踪되었던 高等學生 金朱烈의 屍身이 馬山 앞바다에서 催淚彈이 눈에 박힌 채로 發見되었습니다. 이 消息이 全國에 알려지면서 示威는 馬山을 넘어 全國적 抗爭으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不正 選擧라는 制度的 問題가 金朱烈의 죽음이라는 具體的 事件과 結合하면서 國民的 憤怒로 轉換된 過程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4·19 革命
4月 18日 高麗大學校 學生들이 示威를 마치고 學校로 돌아가던 중 政治 깡패 集團의 襲擊을 받아 다수가 負傷했습니다. 이 事件이 起爆劑가 되어 다음 날인 4月 19日, 서울을 비롯한 全國의 大學生과 高等學生, 市民이 일제히 거리로 나섰습니다. 示威隊는 景武臺(大統領 官邸)로 향했고, 警察의 發砲로 서울에서만 100名 이상이 死亡했습니다('피의 火曜日'). 政府는 戒嚴을 宣布했지만 示威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4月 25日에는 大學 敎授들이 時局 宣言을 내고 李承晩의 下野를 要求하며 거리 行進에 나섰습니다. 知識人 集團인 大學 敎授단의 參與는 運動이 學生만의 示威에서 社會 全般의 抵抗으로 擴大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더해 美國이 李承晩 政權에 對한 支持를 撤回할 氣色을 보이면서 李承晩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습니다. 결국 4月 26日 李承晩은 下野 聲明을 發表하고 大統領職에서 물러났으며, 5月 Hawaii로 亡命했습니다.
意義와 限界
4·19 革命은 學生과 市民의 힘으로 獨裁 政權을 무너뜨린 大韓民國 憲政史 최초의 事例입니다. 이 점에서 大韓民國 憲法 前文은 지금도 4·19 民主 理念의 繼承을 明示하고 있습니다. 다만 4·19 革命의 限界도 分明합니다. 革命은 李承晩 個人의 退陣을 이끌어냈을 뿐, 權力을 넘겨받은 것은 學生과 市民이 아니라 外務 長官 許政을 首班으로 한 過渡 政府였습니다. 다시 말해 4·19는 憲法 자체를 바꾸지 않고도 大統領 한 사람을 물러나게 한 事件이었고, 民主的 制度를 새로 設計하는 課題는 뒤에 남았습니다.
張勉 內閣과 民主化의 挫折
第2共和國
李承晩 下野 이후 1960秊 6月, 許政 過渡 政府는 內閣 責任制와 兩院制 國會를 骨子로 憲法을 改正했습니다(第3次 改憲). 大統領의 權限을 儀典적 水準으로 縮小하고 實質적 行政 權限을 國務 總理에게 준 것으로, 李承晩 長期 執權의 手段이었던 大統領 中心制에 對한 反省이 담긴 改憲이었습니다.
7月 29日 이어진 總選擧에서 民主黨이 壓勝했고, 大統領에는 尹潽善, 國務 總理에는 張勉이 選出되었습니다. 그러나 民主黨은 執權 전부터 舊派와 新派로 分裂되어 있었고, 執權 이후에도 內紛이 持續되어 强力한 國政 運營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4·19 이후 抑壓되어 있던 勞動·統一 運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社會는 活氣를 띠었지만, 張勉 政府는 이를 收拾할 統制力과 經濟 難局을 打開할 力量을 함께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5·16 軍事 政變
1961秊 5月 16日 朴正熙 少將을 中心으로 한 일부 軍 勢力이 兵力을 動員해 國家 權力을 掌握했습니다. 이들은 國家 再建 最高 會議를 設置해 立法·行政 權限을 모두 거머쥐고 軍政을 實施했습니다. 張勉 政府가 反革命 勢力의 動向을 把握하지 못한 채 無力하게 무너졌다는 점에서, 이 政變은 第2共和國이 社會 混亂을 收拾할 力量을 갖추지 못했음을 露呈한 事件이기도 합니다.
1963秊 朴正熙는 軍服을 벗고 大統領 選擧에 出馬해 當選되면서 形式상 民政으로 移讓했습니다. 그러나 實質的으로는 軍 出身 勢力이 政治 權力을 持續적으로 掌握하는 構造가 이어졌습니다. 1969秊에는 大統領의 三選을 許容하는 改憲(三選 改憲)이 이루어지면서, 李承晩 時期와 類似한 長期 執權을 위한 改憲이 反復되고 있다는 批判이 나왔습니다.
維新 體制
維新 憲法의 構造
1972秊 10月 朴正熙는 非常 戒嚴을 宣布하고 國會를 解散한 뒤, 國民 投票로 새 憲法을 確定했습니다. 이를 10月 維新, 새 憲法을 維新 憲法이라 부릅니다. 維新 憲法은 '韓國적 民主主義'를 標榜했지만, 實際 內容은 大統領 한 사람에게 權力을 集中시키는 裝置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大統領은 國民이 直接 뽑지 않고 統一 主體 國民 會議라는 別途 機構에서 間接 選出했으며, 任期는 6秊으로 늘어났고 重任 制限도 없어졌습니다. 國會 議員의 三分의 一은 大統領이 推薦해 統一 主體 國民 會議에서 一括 選出하도록 했는데(維新 政友會), 이는 國會의 多數를 大統領이 事實上 左右할 수 있게 만드는 裝置였습니다. 무엇보다 大統領에게는 國民의 自由와 權利를 制限할 수 있는 緊急 措置權이 주어졌는데, 緊急 措置는 法律과 같은 效力을 가지면서도 司法 審査의 對象이 되지 않았습니다. 憲法에 對한 批判과 改憲 論議 자체를 處罰할 수 있게 한 것도 緊急 措置였습니다.
이 構造를 制憲 憲法 이래의 大統領 直選制와 比較하면 維新 體制의 性格이 分明해집니다. 制憲 憲法조차 國民이 大統領을 直接 뽑는 方式은 아니었지만 國會가 公開적으로 選出하는 方式이었던 데 反해, 維新 憲法의 統一 主體 國民 會議는 大統領이 事實上 정해 놓은 候補를 形式的으로 追認하는 機構에 가까웠습니다.
抵抗과 崩壞
維新 體制에 對한 抵抗은 여러 갈래로 나타났습니다. 1973秊 張俊河 등은 改憲 請願 百萬人 署名 運動을 벌였고, 1976秊에는 在野 人士들이 明洞 聖堂에서 3·1 民主 救國 宣言을 發表해 維新 體制의 終熄과 民主 回復을 要求했습니다. 政府는 이런 움직임을 緊急 措置로 억눌렀습니다.
1979秊에는 女性 勞動者들이 일하던 YH 貿易이 廢業을 通報하자 勞動者들이 新民黨舍에서 籠城을 벌였고, 警察이 이를 强制 鎭壓하는 過程에서 勞動者가 死亡했습니다. 이 事件을 契機로 新民黨 總裁 金泳三이 國會에서 除名되는 일까지 벌어지자, 1979秊 10月 金泳三의 政治的 基盤이었던 釜山과 馬山에서 大規模 反維新 示威가 일어났습니다(釜·馬 民主 抗爭). 政府 內部에서도 이 事態에 對한 對應 方式을 둘러싸고 葛藤이 생겼습니다. 中央情報部長 金載圭는 强硬 鎭壓을 主張하는 警護室長 車智澈과 對立하다가, 1979秊 10月 26日 晩餐 자리에서 朴正熙를 殺害했습니다(10·26 事態). 維新 體制는 이렇게 政權 內部의 龜裂 속에서 갑작스럽게 무너졌습니다.
維新 體制가 外部의 大衆 蜂起가 아니라 權力 核心部의 內部 葛藤으로 끝났다는 점은 以後 展開와 이어집니다. 體制를 무너뜨린 主體가 市民이 아니었기 때문에, 維新 體制가 끝났다고 해서 民主化가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新軍部와 5·18 民主化 運動
12·12 事態
朴正熙 死亡 이후 國務 總理 崔圭夏가 大統領職을 이어받았고, 維新 憲法의 改正을 包含한 政治 日程이 論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79秊 12月 12日 全斗煥·盧泰愚를 中心으로 한 新軍部 勢力이 戒嚴司令官 鄭昇和를 强制로 連行하며 軍의 指揮權을 掌握했습니다(12·12 事態). 이는 正當한 指揮 系統을 거치지 않은 軍事 反亂이었습니다.
1980秊 봄 維新 體制가 끝난 뒤의 政治的 空白 속에서 民主化에 對한 期待가 높아졌습니다. 이 時期를 '서울의 봄'이라 부릅니다. 大學가에서는 戒嚴 解除와 新軍部 退陣을 要求하는 示威가 擴散되었습니다.
5·18 民主化 運動
新軍部는 1980秊 5月 17日 非常 戒嚴을 全國으로 擴大하고 主要 政治人을 逮捕했습니다. 다음 날인 5月 18日 全羅南道 光州에서 戒嚴 擴大에 抗議하는 學生 示威가 일어나자, 政府는 空輸 部隊를 投入해 示威隊를 過剩 鎭壓했습니다. 戒嚴軍의 暴力的 鎭壓에 憤怒한 市民들이 加勢하면서 示威는 大規模 抗爭으로 번졌고, 市民들은 스스로 武裝해 市民軍을 組織하고 戒嚴軍을 光州 市內에서 몰아내는 데 成功했습니다.
이후 光州는 戒嚴軍에 依해 外部와의 通信과 交通이 遮斷된 채 孤立되었습니다. 市民들은 自治的으로 都市를 運營하며 協商을 試圖했지만, 5月 27日 戒嚴軍이 全羅南道廳에 再進入하면서 市民軍의 抵抗은 武力으로 鎭壓되었고 다수의 死亡者와 負傷者가 發生했습니다(5·18 民主化 運動).
5·18 民主化 運動은 維新 體制 崩壞 이후 처음 나타난 大規模 市民 抗爭이었지만, 情報가 徹底히 遮斷된 狀態에서 光州가 孤立된 채 鎭壓되었기 때문에 全國的 擴散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점은 뒤에서 살펴볼 6月 民主 抗爭과 뚜렷이 對比됩니다. 6月 民主 抗爭이 서울을 비롯한 全國 主要 都市로 同時에 擴散되고 中産層까지 示威에 加勢했던 것과 달리, 5·18은 光州라는 한 地域에 孤立된 채 新軍部의 壓倒的인 軍事力 앞에서 鎭壓되었습니다. 이 差異가 두 抗爭의 結果를 갈랐습니다.
第5共和國과 6月 民主 抗爭
第5共和國
5·18 鎭壓 이후 新軍部는 國家 保衛 非常 對策 委員會(國保委)를 設置해 實質的인 統治 機構로 삼았습니다. 言論社를 統廢合해 批判的 言論을 없애고, 不良輩 團束을 名分으로 三淸敎育隊를 運營해 人權을 廣範위하게 侵害했습니다. 1980秊 8月 全斗煥은 統一 主體 國民 會議의 間接 選擧를 통해 大統領에 就任했고, 같은 해 10月에는 大統領 任期를 7秊 單任으로 하되 大統領 選擧人團이라는 別途 機構를 통한 間接 選擧 方式은 그대로 維持하는 새 憲法을 만들었습니다(第5共和國 憲法).
任期를 한 번으로 制限했다는 점에서 維新 憲法보다는 長期 執權의 危險을 줄인 것처럼 보이지만, 國民이 大統領을 直接 뽑지 못한다는 根本的인 問題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第5共和國을 '維新 體制의 延長' 또는 '純化된 形態'로 보는 評價가 나옵니다. 政府는 다른 한편으로 夜間 通行 禁止를 解除하고 頭髮과 校服 自律化를 施行했으며, 프로 野球를 出帆시키고 아시아 競技 大會와 올림픽 誘致를 推進하는 등 宥和的인 政策도 함께 펼쳤습니다.
6月 民主 抗爭, 6·29 宣言
1987秊 1月 서울大學校 學生 朴鍾哲이 警察 調査를 받던 중 拷問으로 死亡하는 事件이 일어났습니다. 政府는 처음에 死因을 숨기려 했으나 眞相이 드러나면서 國民的 公憤이 커졌습니다. 이런 狀況에서 全斗煥은 그해 4月 13日 任期 내 改憲 論議를 中斷하고 旣存 憲法에 따라 政府를 移讓하겠다고 發表했습니다(4·13 護憲 措置). 國民 大多數가 願하던 大統領 直選制 改憲 要求를 正面으로 拒否한 것이어서 反撥은 더욱 커졌습니다.
6月 9日 示威 途中 延世大學校 學生 李韓烈이 催淚彈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消息이 알려지며 示威는 全國으로 擴散되었습니다. 6月 10日 全國 主要 都市에서 '護憲 撤廢, 獨裁 打倒'를 내건 大規模 示威가 벌어졌습니다(6月 民主 抗爭). 이 抗爭이 以前의 民主化 運動과 다른 점은 參與 階層의 폭이었습니다. 學生과 在野 勢力뿐 아니라 이른바 '넥타이 部隊'로 불린 事務職 勞動者와 中産層 市民까지 示威에 加勢했고, 示威는 서울에 局限되지 않고 全國 主要 都市에서 同時多發적으로 벌어졌습니다.
結局 與黨 大統領 候補였던 盧泰愚는 6月 29日 大統領 直選制 改憲 受容을 비롯한 政治 日程을 發表했습니다(6·29 宣言). 이에 따라 그해 10月 大統領 直選制와 5秊 單任制를 骨子로 한 憲法 改正이 國民 投票로 確定되었습니다(第9次 改憲). 이 憲法은 以後 現在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6月 民主 抗爭이 4·19 革命이나 5·18 民主化 運動과 區別되는 地點은, 示威가 特定 人物의 退陣이 아니라 大統領을 國民이 直接 뽑을 수 있는 制度 자체를 要求했고, 그 要求가 實際로 憲法 改正이라는 制度的 結實로 이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4·19는 大統領을 물러나게 했지만 以後의 政治 秩序를 지켜내지 못한 채 軍事 政變으로 挫折되었고, 5·18은 抗爭 자체가 武力으로 鎭壓되었습니다. 反면 6月 民主 抗爭은 執權 勢力의 讓步를 이끌어냈고, 그 結果로 만들어진 憲法 體制가 只今까지 維持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두 事件과 區別됩니다.
整理
| 時期 | 事件 |
|---|---|
| 1952 | 拔萃 改憲(釜山 政治 波動) |
| 1954 | 四捨五入 改憲 |
| 1960.3. | 3·15 不正 選擧, 馬山 義擧 |
| 1960.4. | 4·19 革命, 李承晩 下野 |
| 1960.6. | 第3次 改憲(內閣 責任制), 張勉 內閣 出帆 |
| 1961.5. | 5·16 軍事 政變 |
| 1969 | 3選 改憲 |
| 1972.10. | 10月 維新, 維新 憲法 確定 |
| 1979.10. | 釜·馬 民主 抗爭 |
| 1979.10.26. | 10·26 事態(朴正熙 死亡) |
| 1979.12.12. | 12·12 事態(新軍部 登場) |
| 1980.5. | 5·18 民主化 運動 |
| 1980~1981 | 國保委 設置, 第5共和國 出帆 |
| 1987.1. | 朴鍾哲 拷問 致死 事件 |
| 1987.4.13. | 4·13 護憲 措置 |
| 1987.6. | 6月 民主 抗爭, 6·29 宣言 |
| 1987.10. | 第9次 改憲(大統領 直選制) |
李承晩·朴正熙·全斗煥 세 政權은 모두 憲法을 自身에게 有利하게 고쳐 權力을 維持했다는 共通點이 있지만, 그 方式은 直選制 强行, 長期 執權을 위한 改憲, 間接 選擧 機構를 통한 權力 集中으로 계속 달라졌습니다. 이에 맞선 抵抗 역시 學生 中心의 蜂起(4·19), 地域에 孤立된 抗爭(5·18), 全 階層이 參與한 全國的 抗爭(6月 民主 抗爭)으로 性格이 바뀌어 갔습니다. 1987秊 이후 大統領 直選制가 只今까지 維持되고 있다는 事實은, 이 憲法 體制가 特定 政權의 産物이 아니라 6月 民主 抗爭이라는 廣範위한 國民的 合意를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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