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主化민주화

◁ 6·25 戰爭전쟁과 分斷분단의 固着化고착화 | 經濟경제 成長성장과 그 影響영향 ▷

■ 10韓한史사2-02-03: 4·19 革命혁명에서 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에 이르는 民主化민주화 過程과정을 探究탐구한다.


李承晩이승만 政權정권

拔萃발췌 改憲개헌, 四捨五入사사오입 改憲개헌

大韓民國대한민국 政府정부가 세워질 때의 制憲제헌 憲法헌법은 大統領대통령을 國會국회가 間接간접 選出선출하도록 했습니다. 李承晩이승만은 이 方式방식으로는 再選재선이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制憲제헌 國會국회 議員의원 다수가 反반李承晩이승만 性向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2秊년 李承晩이승만은 戰時전시 首都수도였던 釜山부산에서 戒嚴계엄을 宣布선포하고 國會국회 議員의원을 拘束구속·脅迫협박해 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를 骨子골자로 하는 憲法헌법 改正案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政府정부가 낸 直選制직선제 改憲案개헌안과 國會국회가 낸 內閣내각 責任制책임제 改憲案개헌안을 뒤섞어 통과시켰다고 해서 拔萃발췌 改憲개헌이라 부릅니다. 釜山부산 政治정치 波動파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改憲개헌이 정상적인 節次절차가 아니라 暴力폭력과 脅迫협박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줍니다.

이 直選制직선제 憲法헌법으로 1952秊년 再選재선에 성공한 李承晩이승만은 三選삼선을 위한 障礙物장애물과 다시 마주쳤습니다. 憲法헌법이 大統領대통령의 重任중임을 한 次例차례로 制限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4秊년 政府정부는 '初代초대 大統領대통령에 限한하여 重任중임 制限제한을 撤廢철폐한다'는 條項조항을 改憲案개헌안에 넣어 國會국회에 부쳤습니다. 表決표결 結果결과는 在籍재적 議員의원 203名명 가운데 贊成찬성 135票표로, 改憲개헌에 必要필요한 三分삼분의 二이에 未達미달했습니다. 政府정부·與黨여당은 四捨五入사사오입(반올림)의 原理원리를 끌어와 135.33을 반올림하면 135이므로 可決가결이라고 主張주장하며, 議決의결 定足數정족수에 未達미달한 表決표결을 議決의결로 認定인정했습니다. 이를 四捨五入사사오입 改憲개헌이라 부릅니다.

進步黨진보당 事件사건

1956秊년 大統領대통령 選擧선거에서 進步黨진보당의 曺奉岩조봉암은 216萬만여 票표를 얻으며 李承晩이승만에 이은 2位위를 차지했습니다. 進步黨진보당은 民主的민주적 平和평화 統一통일, 計劃계획 經濟경제 등을 내세워 自由黨자유당과 民主黨민주당으로 양분되어 있던 政治정치 構圖구도에서 새로운 勢力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1958秊년 1月월 警察경찰은 曺奉岩조봉암과 進步黨진보당 幹部간부들을 國家保安法국가보안법 違反위반과 間諜간첩 嫌疑혐의로 逮捕체포했습니다. 이어 政府정부는 進步黨진보당의 登錄등록을 取消취소하여 政黨정당 活動활동을 사실상 끝냈습니다. 曺奉岩조봉암은 1審심에서 間諜罪간첩죄에 對대해 無罪무죄 判決판결을 받았으나, 2審심과 大法院대법원에서는 死刑사형이 宣告선고되었고 1959秊년 7月월 31日일 刑형이 執行집행되었습니다.

이 事件사건은 選擧선거에서 상당한 支持지지를 얻은 合法합법 野黨야당이 國家保安法국가보안법과 司法사법 節次절차를 거쳐 政治정치 舞臺무대에서 사라진 事例사례였습니다. 2011秊년 大法院대법원은 再審재심에서 曺奉岩조봉암의 間諜간첩 및 國家保安法국가보안법 違反위반 嫌疑혐의에 對대해 無罪무죄를 宣告선고했습니다.

餘滴여적 筆禍필화 事件사건

野黨야당에 對대한 壓迫압박과 함께 言論언론에 對대한 統制통제도 강화되었습니다. 1959秊년 2月월 4日일 《京鄕新聞경향신문》의 固定고정 欄란인 「餘滴여적」에는 公正공정한 選擧선거를 통해 多數다수의 뜻을 反映반영하지 못한다면 革命혁명과 같은 다른 方式방식으로 그 뜻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內容내용의 論說논설이 실렸습니다.

政府정부는 이를 內亂내란 煽動선동 등으로 보고 筆者필자 朱耀翰주요한과 京鄕新聞경향신문 社長사장 韓昌愚한창우를 起訴기소했습니다. 이어 4月월에는 美軍政미군정 法令법령을 근거로 《京鄕新聞경향신문》의 發行발행 許可허가를 取消취소했습니다. 法院법원이 處分처분의 執行집행 停止정지를 결정하자 政府정부는 다시 無期무기 停刊정간 處分처분을 내렸고, 신문은 4·19 革命혁명으로 李承晩이승만이 물러난 뒤에야 다시 발행될 수 있었습니다.

2·28 民主민주 運動운동

1960秊년 選擧선거를 앞두고 自由黨자유당의 選擧선거 介入개입에 對대한 反撥반발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2月월 28日일 大邱대구에서는 高等學生고등학생들이 野黨야당의 選擧선거 遊說유세에 學生학생이 참가하는 것을 막으려는 學校학교 當局당국의 措置조치에 抗議항의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2·28 民主민주 運動운동은 3·15 不正부정 選擧선거보다 앞서 일어난 學生학생 中心중심의 抵抗저항이었습니다. 이후 大田대전의 3·8 民主민주 義擧의거와 馬山마산의 3·15 義擧의거로 學生학생·市民시민의 抗議항의가 이어지면서 4·19 革命혁명으로 연결되었습니다.

3·15 不正부정 選擧선거

1960秊년 3月월 15日일 正정·副統領부통령 選擧선거를 앞두고 李承晩이승만의 高齡고령이 問題문제로 떠올랐습니다. 大統領대통령이 有故유고될 境遇경우 副統領부통령이 職직을 承繼승계하므로, 與黨여당 自由黨자유당은 副統領부통령 候補후보 李起鵬이기붕의 當選당선을 絶對절대 課題과제로 삼았습니다. 政府정부는 內務部내무부 長官장관 崔仁圭최인규를 통해 全國전국에 不正부정 選擧선거 指針지침을 내렸습니다. 投票函투표함에 四割사할의 票표를 미리 채워 넣는 事前사전 投票투표, 서너 명에서 아홉 명씩 組조를 지어 投票所투표소에 들어가 서로 監視감시하며 公開공개 投票투표하게 만든 三人組삼인조·九人組구인조 投票투표, 野黨야당 參觀人참관인을 投票所투표소에서 쫓아내는 方式방식 등이 動員동원되었습니다.

이 不正부정이 露骨노골적으로 드러난 곳이 慶尙南道경상남도 馬山마산이었습니다. 選擧선거 當日당일 馬山마산 市民시민과 學生학생은 不正부정 選擧선거에 抗議항의하며 示威시위를 벌였고, 警察경찰이 이에 發砲발포해 死傷者사상자가 發生발생했습니다(馬山마산 一次일차 義擧의거).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 지난 4月월 11日일, 失踪실종되었던 高等學生고등학생 金朱烈김주열의 屍身시신이 馬山마산 앞바다에서 催淚彈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로 發見발견되었습니다. 이 消息소식이 全國전국에 알려지면서 示威시위는 馬山마산을 넘어 全國전국적 抗爭항쟁으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不正부정 選擧선거라는 制度的제도적 問題문제가 金朱烈김주열의 죽음이라는 具體的구체적 事件사건과 結合결합하면서 國民的국민적 憤怒분노로 轉換전환된 過程과정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4·19 革命혁명

4月월 18日일 高麗大學校고려대학교 學生학생들이 示威시위를 마치고 學校학교로 돌아가던 중 政治정치 깡패 集團집단의 襲擊습격을 받아 다수가 負傷부상했습니다. 이 事件사건이 起爆劑기폭제가 되어 다음 날인 4月월 19日일, 서울을 비롯한 全國전국의 大學生대학생과 高等學生고등학생, 市民시민이 일제히 거리로 나섰습니다. 示威隊시위대는 景武臺경무대(大統領대통령 官邸관저)로 향했고, 警察경찰의 發砲발포로 서울에서만 100名명 이상이 死亡사망했습니다('피의 火曜日화요일'). 政府정부는 戒嚴계엄을 宣布선포했지만 示威시위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4月월 25日일에는 大學대학 敎授교수들이 時局시국 宣言선언을 내고 李承晩이승만의 下野하야를 要求요구하며 거리 行進행진에 나섰습니다. 知識人지식인 集團집단인 大學대학 敎授교수단의 參與참여는 運動운동이 學生학생만의 示威시위에서 社會사회 全般전반의 抵抗저항으로 擴大확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더해 美國미국이 李承晩이승만 政權정권에 對대한 支持지지를 撤回철회할 氣色기색을 보이면서 李承晩이승만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습니다. 결국 4月월 26日일 李承晩이승만은 下野하야 聲明성명을 發表발표하고 大統領대통령職직에서 물러났으며, 5月월 하와이로 亡命망명했습니다.

意義의의와 限界한계

4·19 革命혁명은 學生학생과 市民시민의 힘으로 獨裁독재 政權정권을 무너뜨린 大韓民國대한민국 憲政史헌정사 최초의 事例사례입니다. 이 점에서 大韓民國대한민국 憲法헌법 前文전문은 지금도 4·19 民主민주 理念이념의 繼承계승을 明示명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4·19 革命혁명의 限界한계도 分明분명합니다. 革命혁명은 李承晩이승만 個人개인의 退陣퇴진을 이끌어냈을 뿐, 權力권력을 넘겨받은 것은 學生학생과 市民시민이 아니라 外務외무 長官장관 許政허정을 首班수반으로 한 過渡과도 政府정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4·19는 憲法헌법 자체를 바꾸지 않고도 大統領대통령 한 사람을 물러나게 한 事件사건이었고, 民主的민주적 制度제도를 새로 設計설계하는 課題과제는 뒤에 남았습니다.

張勉장면 內閣내각과 民主化민주화의 挫折좌절

第제2共和國공화국

李承晩이승만 下野하야 이후 1960秊년 6月월, 許政허정 過渡과도 政府정부는 內閣내각 責任制책임제와 兩院制양원제 國會국회를 骨子골자로 憲法헌법을 改正개정했습니다(第제3次차 改憲개헌). 大統領대통령의 權限권한을 儀典의전적 水準수준으로 縮小축소하고 實質실질적 行政행정 權限권한을 國務국무 總理총리에게 준 것으로, 李承晩이승만 長期장기 執權집권의 手段수단이었던 大統領대통령 中心중심制제에 對대한 反省반성이 담긴 改憲개헌이었습니다.

7月월 29日일 이어진 總選擧총선거에서 民主黨민주당이 壓勝압승했고, 大統領대통령에는 尹潽善윤보선, 國務국무 總理총리에는 張勉장면이 選出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民主黨민주당은 執權집권 전부터 舊派구파와 新派신파로 分裂분열되어 있었고, 執權집권 이후에도 內紛내분이 持續지속되어 强力강력한 國政국정 運營운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4·19 이후 抑壓억압되어 있던 勞動노동·統一통일 運動운동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社會사회는 活氣활기를 띠었지만, 張勉장면 政府정부는 이를 收拾수습할 統制力통제력과 經濟경제 難局난국을 打開타개할 力量역량을 함께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5·16 軍事군사 政變정변

1961秊년 5月월 16日일 朴正熙박정희 少將소장을 中心중심으로 한 일부 軍군 勢力세력이 兵力병력을 動員동원해 國家국가 權力권력을 掌握장악했습니다. 이들은 國家국가 再建재건 最高최고 會議회의를 設置설치해 立法입법·行政행정 權限권한을 모두 거머쥐고 軍政군정을 實施실시했습니다. 張勉장면 政府정부가 反반革命혁명 勢力세력의 動向동향을 把握파악하지 못한 채 無力무력하게 무너졌다는 점에서, 이 政變정변은 第제2共和國공화국이 社會사회 混亂혼란을 收拾수습할 力量역량을 갖추지 못했음을 露呈노정한 事件사건이기도 합니다.

軍政군정은 1962秊년 國民국민 投票투표로 大統領대통령 中心制중심제와 單院制단원제 國會국회로 돌아가는 憲法헌법 改正개정을 確定확정했습니다. 1963秊년 朴正熙박정희는 軍服군복을 벗고 大統領대통령 選擧선거에 出馬출마해 當選당선되면서 形式형식상 民政민정으로 移讓이양했습니다. 그러나 實質的실질적으로는 軍군 出身출신 勢力세력이 政治정치 權力권력을 持續지속적으로 掌握장악하는 構造구조가 이어졌습니다. 1969秊년에는 大統領대통령의 三選삼선을 許容허용하는 改憲개헌(三選삼선 改憲개헌)이 이루어지면서, 李承晩이승만 時期시기와 類似유사한 長期장기 執權집권을 위한 改憲개헌이 反復반복되고 있다는 批判비판이 나왔습니다.

6·3 抗爭항쟁

民政민정 移讓이양 뒤에도 朴正熙박정희 政府정부와 學生학생·野黨야당 사이의 衝突충돌은 계속되었습니다. 1964秊년 政府정부가 日本일본과의 國交국교 正常化정상화를 서두르자 學生학생과 野黨야당, 社會사회 團體단체는 韓日한일 會談회담의 內容내용과 推進추진 方式방식에 反對반대하며 大規模대규모 示威시위를 벌였습니다.

3月월부터 이어진 反對반대 運動운동은 6月월 3日일 서울에서 絶頂절정에 이르렀습니다. 政府정부는 서울에 非常비상 戒嚴계엄을 宣布선포하고 軍군을 投入투입해 示威시위를 진압했습니다. 이를 6·3 抗爭항쟁이라 합니다. 4·19 이후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 學生학생 運動운동이 朴正熙박정희 政府정부와 처음으로 크게 충돌한 事件사건이었으며, 이후 學生학생 運動운동이 長期장기 執權집권과 權威主義권위주의에 反對반대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維新유신 體制체제

維新유신 憲法헌법의 構造구조

維新유신이 나온 背景배경에는 안팎의 危機感위기감이 있었습니다. 1969秊년 美國미국 大統領대통령 닉슨은 아시아의 防衛방위는 一次的일차적으로 아시아 나라 스스로 責任책임지라는 닉슨 독트린을 發表발표했고, 1971秊년 3月월에는 駐韓주한 美軍미군 第제7師團사단 約약 2萬만 名명이 撤收철수했습니다. 美國미국과 中國중국이 가까워지는 데탕트의 흐름 속에서 安保안보 不安불안이 커졌습니다. 國內국내에서는 1969秊년 大統領대통령이 세 番번까지 이어서 할 수 있도록 憲法헌법을 고친 3選선 改憲개헌으로 다시 出馬출마한 朴正熙박정희가 1971秊년 大統領대통령 選擧선거에서 新民黨신민당의 金大中김대중 候補후보를 得票率득표율 53.2% 對대 45.3%로 눌렀지만 差異차이는 생각보다 작았고, 이어진 國會議員국회의원 選擧선거에서도 新民黨신민당이 改憲개헌을 막을 수 있는 三分삼분의 一일을 넘는 議席의석을 얻었습니다. 그해 12月월 朴正熙박정희는 國家국가 非常비상 事態사태를 宣言선언하고, 大統領대통령에게 非常비상 大權대권을 주는 國家국가 保衛보위에 關관한 特別특별 措置法조치법을 與黨여당 單獨단독으로 通過통과시켰습니다.

1972秊년 7月월 4日일에는 南北남북이 自主자주·平和평화·民族민족 大團結대단결의 統一통일 3原則원칙을 담은 7·4 南北남북 共同공동 聲明성명을 發表발표했습니다. 그러나 南北남북 對話대화는 오래가지 못했고, 政府정부는 平和평화 統一통일을 뒷받침하려면 强力강력한 體制체제가 必要필요하다는 論理논리로 維新유신을 正當化정당화했습니다. 北韓북한도 같은 해 12月월 主席주석에게 權力권력을 集中집중시킨 社會主義사회주의 憲法헌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南北남북 對話대화가 오히려 南남과 北북 各各각각의 權力권력 强化강화에 利用이용되었다는 評價평가를 받습니다.

1972秊년 10月월 朴正熙박정희는 非常비상 戒嚴계엄을 宣布선포하고 國會국회를 解散해산한 뒤, 國民국민 投票투표로 새 憲法헌법을 確定확정했습니다. 이를 10月월 維新유신, 새 憲法헌법을 維新유신 憲法헌법이라 부릅니다. 維新유신 憲法헌법은 '韓國한국적 民主主義민주주의'를 標榜표방했지만, 實際실제 內容내용은 大統領대통령 한 사람에게 權力권력을 集中집중시키는 裝置장치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大統領대통령은 國民국민이 直接직접 뽑지 않고 統一통일 主體주체 國民국민 會議회의라는 別途별도 機構기구에서 間接간접 選出선출했으며, 任期임기는 6秊년으로 늘어났고 重任중임 制限제한도 없어졌습니다. 國會국회 議員의원의 三分삼분의 一일은 大統領대통령이 推薦추천해 統一통일 主體주체 國民국민 會議회의에서 一括일괄 選出선출하도록 했는데(維新유신 政友會정우회), 이는 國會국회의 多數다수를 大統領대통령이 事實上사실상 左右좌우할 수 있게 만드는 裝置장치였습니다. 무엇보다 大統領대통령에게는 國民국민의 自由자유와 權利권리를 制限제한할 수 있는 緊急긴급 措置조치權권이 주어졌는데, 緊急긴급 措置조치는 法律법률과 같은 效力효력을 가지면서도 司法사법 審査심사의 對象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憲法헌법에 對대한 批判비판과 改憲개헌 論議논의 자체를 處罰처벌할 수 있게 한 것도 緊急긴급 措置조치였습니다.

이 構造구조를 制憲제헌 憲法헌법 이래의 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와 比較비교하면 維新유신 體制체제의 性格성격이 分明분명해집니다. 制憲제헌 憲法헌법조차 國民국민이 大統領대통령을 直接직접 뽑는 方式방식은 아니었지만 國會국회가 公開공개적으로 選出선출하는 方式방식이었던 데 反반해, 維新유신 憲法헌법의 統一통일 主體주체 國民국민 會議회의는 大統領대통령이 事實上사실상 정해 놓은 候補후보를 形式的형식적으로 追認추인하는 機構기구에 가까웠습니다.

民靑學聯민청학련·人革黨인혁당 再建委재건위 事件사건

維新유신 體制체제는 緊急긴급 措置조치를 이용해 學生학생과 在野재야 勢力세력의 反對반대 運動운동을 강하게 억눌렀습니다. 1974秊년 4月월 政府정부는 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즉 民靑學聯민청학련이 國家국가 變亂변란을 꾀했다고 발표하고 緊急긴급 措置조치 4號호를 내려 관련 學生학생과 人士인사들을 대거 逮捕체포했습니다.

中央情報部중앙정보부는 다시 民靑學聯민청학련의 뒤에 '人民革命黨인민혁명당 再建재건 委員會위원회'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관련자들은 軍事군사 法院법원에서 裁判재판을 받았고, 1975秊년 4月월 大法院대법원에서 死刑사형이 確定확정된 관련자 8名명은 이튿날 새벽 刑형이 執行집행되었습니다. 2007秊년 再審재심에서 이들에게 無罪무죄가 宣告선고되었습니다. 國家국가 權力권력이 司法사법 節次절차를 거쳐 사람의 生命생명을 빼앗은 '司法사법 殺人살인'의 代表的대표적 事例사례로 꼽힙니다.

抵抗저항과 崩壞붕괴

維新유신 體制체제에 對대한 抵抗저항은 여러 갈래로 나타났습니다. 1973秊년 張俊河장준하 등은 改憲개헌 請願청원 百萬人백만인 署名서명 運動운동을 벌였고, 1976秊년에는 在野재야 人士인사들이 明洞명동 聖堂성당에서 3·1 民主민주 救國구국 宣言선언을 發表발표해 維新유신 體制체제의 終熄종식과 民主민주 回復회복을 要求요구했습니다. 政府정부는 이런 움직임을 緊急긴급 措置조치로 억눌렀습니다.

1979秊년에는 女性여성 勞動者노동자들이 일하던 YH 貿易무역이 廢業폐업을 通報통보하자 勞動者노동자들이 新民黨신민당舍사에서 籠城농성을 벌였고, 警察경찰이 이를 强制강제 鎭壓진압하는 過程과정에서 勞動者노동자 김경숙이 死亡사망했습니다. 이 事件사건을 契機계기로 新民黨신민당 總裁총재 金泳三김영삼이 國會국회에서 除名제명되는 일까지 벌어지자, 1979秊년 10月월 金泳三김영삼의 政治的정치적 基盤기반이었던 釜山부산과 馬山마산에서 大規模대규모 反반維新유신 示威시위가 일어났습니다(釜부·馬마 民主민주 抗爭항쟁). 政府정부 內部내부에서도 이 事態사태에 對대한 對應대응 方式방식을 둘러싸고 葛藤갈등이 생겼습니다. 中央情報部중앙정보부長장 金載圭김재규는 强硬강경 鎭壓진압을 主張주장하는 警護室長경호실장 車智澈차지철과 對立대립하다가, 1979秊년 10月월 26日일 晩餐만찬 자리에서 朴正熙박정희를 殺害살해했습니다(10·26 事態사태). 維新유신 體制체제는 이렇게 政權정권 內部내부의 龜裂균열 속에서 갑작스럽게 무너졌습니다.

維新유신 體制체제가 外部외부의 大衆대중 蜂起봉기가 아니라 權力권력 核心部핵심부의 內部내부 葛藤갈등으로 끝났다는 점은 以後이후 展開전개와 이어집니다. 體制체제를 무너뜨린 主體주체가 市民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維新유신 體制체제가 끝났다고 해서 民主化민주화가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新軍部신군부와 5·18 民主化민주화 運動운동

12·12 事態사태

朴正熙박정희 死亡사망 이후 國務국무 總理총리 崔圭夏최규하가 大統領대통령職직을 이어받았고, 維新유신 憲法헌법의 改正개정을 包含포함한 政治정치 日程일정이 論議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79秊년 12月월 12日일 全斗煥전두환·盧泰愚노태우를 中心중심으로 한 新軍部신군부 勢力세력이 戒嚴司令官계엄사령관 鄭昇和정승화를 强制강제로 連行연행하며 軍군의 指揮權지휘권을 掌握장악했습니다(12·12 事態사태). 이는 正當정당한 指揮지휘 系統계통을 거치지 않은 軍事군사 反亂반란이었습니다.

1980秊년 봄 維新유신 體制체제가 끝난 뒤의 政治的정치적 空白공백 속에서 民主化민주화에 對대한 期待기대가 높아졌습니다. 이 時期시기를 '서울의 봄'이라 부릅니다. 大學대학가에서는 戒嚴계엄 解除해제와 新軍部신군부 退陣퇴진을 要求요구하는 示威시위가 擴散확산되었습니다.

5·18 民主化민주화 運動운동

新軍部신군부는 1980秊년 5月월 17日일 非常비상 戒嚴계엄을 全國전국으로 擴大확대하고 主要주요 政治人정치인을 逮捕체포했습니다. 다음 날인 5月월 18日일 全羅南道전라남도 光州광주에서 戒嚴계엄 擴大확대에 抗議항의하는 學生학생 示威시위가 일어나자, 政府정부는 空輸공수 部隊부대를 投入투입해 示威隊시위대를 過剩과잉 鎭壓진압했습니다. 戒嚴軍계엄군의 暴力的폭력적 鎭壓진압에 憤怒분노한 市民시민들이 加勢가세하면서 示威시위는 大規模대규모 抗爭항쟁으로 번졌고, 市民시민들은 스스로 武裝무장해 市民軍시민군을 組織조직하고 戒嚴軍계엄군을 光州광주 市內시내에서 몰아내는 데 成功성공했습니다.

이후 光州광주는 戒嚴軍계엄군에 依의해 外部외부와의 通信통신과 交通교통이 遮斷차단된 채 孤立고립되었습니다. 市民시민들은 自治的자치적으로 都市도시를 運營운영하며 協商협상을 試圖시도했지만, 5月월 27日일 戒嚴軍계엄군이 全羅南道廳전라남도청에 再進入재진입하면서 市民軍시민군의 抵抗저항은 武力무력으로 鎭壓진압되었고 다수의 死亡者사망자와 負傷者부상자가 發生발생했습니다(5·18 民主化민주화 運動운동).

5·18 民主化민주화 運動운동은 維新유신 體制체제 崩壞붕괴 이후 처음 나타난 大規模대규모 市民시민 抗爭항쟁이었지만, 情報정보가 徹底철저히 遮斷차단된 狀態상태에서 光州광주가 孤立고립된 채 鎭壓진압되었기 때문에 全國的전국적 擴散확산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점은 뒤에서 살펴볼 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과 뚜렷이 對比대비됩니다. 眞相진상은 오랫동안 隱蔽은폐되었다가 1988秊년 國會국회 聽聞會청문회와 1990秊代년대 特別法특별법 制定제정, 責任者책임자 處罰처벌을 거치며 드러났고, 2011秊년 5·18 關聯관련 記錄物기록물은 UNESCO 世界세계 記錄기록 遺産유산에 登載등재되었습니다. 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이 서울을 비롯한 全國전국 主要주요 都市도시로 同時동시에 擴散확산되고 中産層중산층까지 示威시위에 加勢가세했던 것과 달리, 5·18은 光州광주라는 한 地域지역에 孤立고립된 채 新軍部신군부의 壓倒的압도적인 軍事力군사력 앞에서 鎭壓진압되었습니다. 이 差異차이가 두 抗爭항쟁의 結果결과를 갈랐습니다.

第제5共和國공화국과 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

第제5共和國공화국

5·18 鎭壓진압 이후 新軍部신군부는 國家국가 保衛보위 非常비상 對策대책 委員會위원회(國保委국보위)를 設置설치해 實質的실질적인 統治통치 機構기구로 삼았습니다. 言論社언론사를 統廢合통폐합해 批判的비판적 言論언론을 없애고, 不良輩불량배 團束단속을 名分명분으로 三淸敎育隊삼청교육대를 運營운영해 人權인권을 廣範광범위하게 侵害침해했습니다. 1980秊년 8月월 全斗煥전두환은 統一통일 主體주체 國民국민 會議회의의 間接간접 選擧선거를 통해 大統領대통령에 就任취임했고, 같은 해 10月월에는 大統領대통령 任期임기를 7秊년 單任단임으로 하되 大統領대통령 選擧人團선거인단이라는 別途별도 機構기구를 통한 間接간접 選擧선거 方式방식은 그대로 維持유지하는 새 憲法헌법을 만들었습니다(第제5共和國공화국 憲法헌법).

任期임기를 한 번으로 制限제한했다는 점에서 維新유신 憲法헌법보다는 長期장기 執權집권의 危險위험을 줄인 것처럼 보이지만, 國民국민이 大統領대통령을 直接직접 뽑지 못한다는 根本的근본적인 問題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第제5共和國공화국을 '維新유신 體制체제의 延長연장' 또는 '純化순화된 形態형태'로 보는 評價평가가 나옵니다. 政府정부는 다른 한편으로 夜間야간 通行통행 禁止금지를 解除해제하고 頭髮두발과 校服교복 自律化자율화를 施行시행했으며, 프로 野球야구를 出帆출범시키고 아시아 競技경기 大會대회와 올림픽 誘致유치를 推進추진하는 등 宥和的유화적인 政策정책도 함께 펼쳤습니다.

公安공안 事件사건과 拷問고문 問題문제

第제5共和國공화국에서도 反政府반정부 學生학생·社會사회 運動운동을 國家保安法국가보안법 등으로 處罰처벌하는 公安공안 事件사건이 이어졌습니다. 1981秊년의 學林학림 事件사건에서는 反반獨裁독재 民主化민주화를 주장하던 學生학생·社會사회 運動운동 관련자들이 反國家반국가 團體단체 構成구성 嫌疑혐의 등으로 處罰처벌되었습니다. 搜査수사 過程과정의 拷問고문과 不法불법 行爲행위가 뒤늦게 확인되었고, 관련자들은 再審재심에서 無罪무죄 判決판결을 받았습니다.

1986秊년에는 富川부천 警察署경찰서에서 勞動노동 運動운동을 하던 權仁淑권인숙이 搜査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警察官경찰관에게 性성 拷問고문을 당한 事件사건이 발생했습니다. 檢察검찰이 처음에는 性성 暴力폭력 事實사실을 부인하면서 事件사건을 축소하려 하자 女性여성·宗敎종교·人權인권 團體단체가 共同공동 對策대책 委員會위원회를 구성해 眞相진상 糾明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이 事件사건은 警察경찰 搜査수사에서의 拷問고문과 人權인권 侵害침해를 社會的사회적 問題문제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 6·29 宣言선언

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은 갑자기 터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1985秊년 2·12 總選총선에서는 選擧선거를 한 달도 채 남기지 않고 創黨창당한 新韓民主黨신한민주당이 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 改憲개헌을 내걸고 돌풍을 일으켜, 官製관제 野黨야당이라는 批判비판을 받던 民主韓國黨민주한국당을 제치고 單番단번에 第제1 野黨야당이 되었습니다. 이 選擧선거로 直選制직선제 改憲개헌이 政治정치의 中心중심 爭點쟁점으로 떠올랐고, 1986秊년에는 新韓民主黨신한민주당과 在野재야 勢力세력이 함께 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 改憲개헌을 위한 1千萬천만 名명 署名서명 運動운동을 벌였습니다. 政府정부는 署名서명 運動운동을 막고 關係者관계자를 團束단속했지만, 改憲개헌 要求요구는 오히려 더 넓게 퍼졌습니다.

1987秊년 1月월 서울大學校대학교 學生학생 朴鍾哲박종철이 警察경찰 調査조사를 받던 중 拷問고문으로 死亡사망하는 事件사건이 일어났습니다. 警察경찰은 처음에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며 死因사인을 숨기려 했으나 眞相진상이 드러나면서 國民的국민적 公憤공분이 커졌습니다. 이런 狀況상황에서 全斗煥전두환은 그해 4月월 13日일 任期임기 내 改憲개헌 論議논의를 中斷중단하고 旣存기존 憲法헌법에 따라 政府정부를 移讓이양하겠다고 發表발표했습니다(4·13 護憲호헌 措置조치). 國民국민 大多數대다수가 願원하던 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 改憲개헌 要求요구를 正面정면으로 拒否거부한 것이어서 反撥반발은 더욱 커졌습니다.

6月월 9日일 示威시위 途中도중 延世연세大學校대학교 學生학생 李韓烈이한열이 催淚彈최루탄에 맞아 쓰러졌고, 그의 消息소식이 알려지며 示威시위는 全國전국으로 擴散확산되었습니다. 6月월 10日일 野黨야당과 在野재야 勢力세력이 함께 만든 民主민주 憲法헌법 爭取쟁취 國民국민 運動운동 本部본부의 主導주도로 全國전국 主要주요 都市도시에서 '護憲호헌 撤廢철폐, 獨裁독재 打倒타도'를 내건 大規模대규모 示威시위가 벌어졌습니다(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 바로 이날은 與黨여당인 民主正義黨민주정의당이 全黨전당 大會대회에서 盧泰愚노태우를 大統領대통령 候補후보로 指名지명한 날이기도 해서, 示威시위는 旣存기존 憲法헌법대로 政權정권을 넘겨받으려는 計劃계획에 맞선다는 意味의미를 띠었습니다. 이 抗爭항쟁이 以前이전의 民主化민주화 運動운동과 다른 점은 參與참여 階層계층의 폭이었습니다. 學生학생과 在野재야 勢力세력뿐 아니라 이른바 '넥타이 部隊부대'로 불린 事務職사무직 勞動者노동자와 中産層중산층 市民시민까지 示威시위에 加勢가세했고, 示威시위는 서울에 局限국한되지 않고 全國전국 主要주요 都市도시에서 同時多發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습니다.

結局결국 與黨여당 大統領대통령 候補후보였던 盧泰愚노태우는 6月월 29日일 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 改憲개헌 受容수용을 비롯한 政治정치 日程일정을 發表발표했습니다(6·29 宣言선언). 이에 따라 그해 10月월 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와 5秊년 單任制단임제를 骨子골자로 한 憲法헌법 改正개정이 國民국민 投票투표로 確定확정되었습니다(第제9次차 改憲개헌). 이 憲法헌법은 以後이후 現在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이 4·19 革命혁명이나 5·18 民主化민주화 運動운동과 區別구별되는 地點지점은, 示威시위가 特定특정 人物인물의 退陣퇴진이 아니라 大統領대통령을 國民국민이 直接직접 뽑을 수 있는 制度제도 자체를 要求요구했고, 그 要求요구가 實際실제로 憲法헌법 改正개정이라는 制度的제도적 結實결실로 이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4·19는 大統領대통령을 물러나게 했지만 以後이후의 政治정치 秩序질서를 지켜내지 못한 채 軍事군사 政變정변으로 挫折좌절되었고, 5·18은 抗爭항쟁 자체가 武力무력으로 鎭壓진압되었습니다. 反반면 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은 執權집권 勢力세력의 讓步양보를 이끌어냈고, 그 結果결과로 만들어진 憲法헌법 體制체제가 只今지금까지 維持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두 事件사건과 區別구별됩니다.

民主化민주화의 制度化제도화

1987秊년 憲法헌법은 直選制직선제만 담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國民국민의 基本權기본권을 强化강화하고, 大統領대통령의 國會국회 解散權해산권을 없앴으며, 憲法裁判所헌법재판소를 새로 두었습니다. 1988秊년 出帆출범한 憲法裁判所헌법재판소는 法律법률의 違憲위헌 與否여부와 基本權기본권 侵害침해를 實際실제로 審判심판하기 始作시작했습니다.

5·16 以後이후 中斷중단되었던 地方自治지방자치도 되살아나, 1991秊년 地方議會지방의회 選擧선거에 이어 1995秊년에는 自治團體長자치단체장까지 住民주민이 直接직접 뽑게 되었습니다. 1997秊년 大統領대통령 選擧선거에서는 與黨여당에서 野黨야당으로 政權정권이 選擧선거를 통해 平和的평화적으로 넘어가는 水平的수평적 政權정권 交替교체가 처음 이루어졌습니다. 選擧선거로 權力권력이 바뀌고, 敗北패배한 쪽이 그 結果결과를 받아들이는 經驗경험이 쌓이면서 民主主義민주주의는 制度제도로 자리 잡아 갔습니다.

整理정리

時期시기事件사건
1952拔萃발췌 改憲개헌(釜山부산 政治정치 波動파동)
1954四捨五入사사오입 改憲개헌
1960.3.3·15 不正부정 選擧선거, 馬山마산 義擧의거
1960.4.4·19 革命혁명, 李承晩이승만 下野하야
1960.6.第제3次차 改憲개헌(內閣내각 責任制책임제), 張勉장면 內閣내각 出帆출범
1961.5.5·16 軍事군사 政變정변
19693選선 改憲개헌
1972.10.10月월 維新유신, 維新유신 憲法헌법 確定확정
1979.10.釜부·馬마 民主민주 抗爭항쟁
1979.10.26.10·26 事態사태(朴正熙박정희 死亡사망)
1979.12.12.12·12 事態사태(新軍部신군부 登場등장)
1980.5.5·18 民主化민주화 運動운동
1980~1981國保委국보위 設置설치, 第제5共和國공화국 出帆출범
1987.1.朴鍾哲박종철 拷問고문 致死치사 事件사건
1987.4.13.4·13 護憲호헌 措置조치
1987.6.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 6·29 宣言선언
1987.10.第제9次차 改憲개헌(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

李承晩이승만·朴正熙박정희·全斗煥전두환 세 政權정권은 모두 憲法헌법을 自身자신에게 有利유리하게 고쳐 權力권력을 維持유지했다는 共通點공통점이 있지만, 그 方式방식은 直選制직선제 强行강행, 長期장기 執權집권을 위한 改憲개헌, 間接간접 選擧선거 機構기구를 통한 權力권력 集中집중으로 계속 달라졌습니다. 이에 맞선 抵抗저항 역시 學生학생 中心중심의 蜂起봉기(4·19), 地域지역에 孤立고립된 抗爭항쟁(5·18), 全전 階層계층이 參與참여한 全國的전국적 抗爭항쟁(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으로 性格성격이 바뀌어 갔습니다. 1987秊년 이후 大統領대통령 直選制직선제가 只今지금까지 維持유지되고 있다는 事實사실은, 이 憲法헌법 體制체제가 特定특정 政權정권의 産物산물이 아니라 6月월 民主민주 抗爭항쟁이라는 廣範광범위한 國民的국민적 合意합의를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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